[아이와 함께하는 천년고찰 108배 프로젝트 | 열여덟 번째 108배]
"108배 한 번 더 해도 괜찮겠어?"
백련사를 나와 인근에 있는 봉원사라는 또 다른 천년고찰에 가기로 한다. 아이에게 하루에 두 번 108배 괜찮냐고 물었더니 괜찮단다. 벌써 여러 번 하루 두 번 108배를 한 전적이 있어서 이쯤은 자신 있나 보다.
지도앱을 보니 백련사에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산만 넘으면 봉원사라 산을 타고 걸어서 가볼까 하다 포기한다. 워낙 소문난 길치라 아이가 욕심부리지 말고 마을버스를 타고 안전하게 가자고 한다. 아이 말에 바로 수긍하고, 정류장에서 회차하는 마을버스를 타고 내려간다.
초행길이라 제대로 가고 있는지 지도앱을 켜고 중간중간 확인을 하며 가고 있는데 주위에 즐겨찾기로 표시해 둔 옥천암이라는 또 다른 천년고찰이 있다. 아이에게 천년고찰 한 군데를 더 가는 건 어떤지 물어봤더니 괜찮단다.
"지금이야, 여기서 내리자."
그리하여 봉원사로 가던 길을 돌려 옥천암에 가기로 한다. 버스 안에 내린 매우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순발력을 발휘해 하차 버튼을 누른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때마침 들어오는 옥천암 가는 버스를 갈아탄다.
버스가 손님들을 싣고 내리기를 몇 번 반복하니 이번엔 인왕산 자락이 나왔다. 홍은동, 홍제동, 이름도 비슷한 이 동네들은 오래된 마을인가 보다. 드문드문 놓인 전봇대 사이로 전깃줄이 걸려 있고, 낮은 연립주택들과 빌라들 사이로 계단이 무수히 많은 언덕이 보인다. 그 사이로 작은 천이 흐르고 뒤에는 바위가 멋들어진 산이 보인다.
신도시로 조성된 아파트촌에서 오랜 시간 자라온 나나 아이에게 이런 마을의 풍경이 사뭇 낯설고도 재미있게 느껴졌다. 언덕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자리 잡은 오래된 가로수들과 타고난 지형에 맞춰 앉은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의 표정이 네모 반듯하게 구획된 넓은 도로와 빼곡한 아파트가 즐비한 우리가 사는 곳과 달라서 버스만 타고 다녀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옥천암은 홍은동 서대문 끝자락에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로 창건 연도는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이 절에 있는 유명한 마애보살좌상이 고려 초기 불상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 이전에 주변에 승가사를 비롯해 신라시대 창건된 다른 절과 유사한 시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단다.
옥천암의 '옥천'은 '아주 맑은 샘'이란 뜻으로 과거 이곳에서 나오는 물이 약효가 있어 아픈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던 곳이란다.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할 때, 흥선대원군 부인이 아들인 고종을 위해 기도를 올린 절이기도 하단다. 찾아보니 전부터 많은 신남신녀들이 와서 기도하고 영험을 얻었다 한다.
작은 천 위로 난 다리를 건너 옥천암으로 들어선다. 옥천암 아래 천변으로 엄청 큰 바위에 부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찾아보니 해수관음상이란다.
높이가 10m나 되는 바위에 새겨진 마애보살좌상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단다. 절이 작아 대웅전 같은 곳은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의 건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108배를 할 곳이 마땅치 않아 대충 주변만 둘러보고 마애보살좌상으로 발길을 돌린다.
마애보살좌상에 가까이 가자 그 앞에 한 남자가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호기심에 더 가까이 가보니 쉬지 않고 들릴 듯 말 듯 무언가 중얼거리며 손으로 합장을 했다 크게 원을 그리고 다시 합장하기를 반복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도 모두 그 불상 앞에서 인사를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시주를 했다. 불상 앞에는 시주를 할 수 있는 불전함 같은 선반과 좌복 대신 쓸 수 있는 매트가 쌓여 있었다.
"이 절에서는 밖에서 절하는 건가 봐."
눈치 레이더가 작동한다. 아이에게 여기서는 불상 앞에서 절하는 것 같으니 우리도 여기서 하자고 속삭인다. 아이와 내가 실내가 아닌 곳에서 108배를 것이 처음은 아니다. 강화도 보문사에 갔을 때 산 중턱에 있던 해수관음상 앞에서, 양평 용문사에서도 전각이 아닌 바깥에서 108배를 했었다.
아이는 밖에서 절을 하면 돌바닥이 너무 딱딱해서 무릎이 아파 108배를 하기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한다. 들어가 절을 할 수 있는 전각이 따로 없는 것 같아 여기가 아니면 108배를 할 곳이 없다고, 그럼 엄마 혼자 하겠다고 하니 그냥 밖에서 하겠단다. 홀로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는 남자 옆으로 매트로 된 낡고 지저분한 좌복을 두 개씩 꺼내어 놓고 108배를 한다.
아이는 또 무릎을 찧으며 빠른 속도로 절을 하느라 숨이 차 씩씩거렸다. 늘 나보다 속도가 빠른 아이는 내가 20배쯤 남았을 때 108배를 끝냈다. 108배를 다 마칠 동안 남자는 여전히 두 손을 모으고 손을 비비며 중얼중얼 기도를 하고 있었다. 엄청 간절하게.
두 번째 108배를 마쳤는데 다리가 후들거리지 않는다. 외려 좀 더 개운한 느낌. 체력이 좀 올라 붙은 걸 느낀다. 108배를 하기 전에도 매일 운동 삼아 하루 1만 보씩 걸었다. 1만 보 걷기만 했을 때는 체력이 눈에 뜨게 좋아진다거나 달라지는 건 모르겠고 현상 유지 정도로 느껴졌었다.
그런데 108배를 하니 뭔가 좀 다른 느낌이다. 원체 손발이 찼는데 108배를 하고 나면 온몸의 혈관에 피가 돌아서 따뜻해졌다. 안 쓰던 근육을 쓰게 되어 그런지 팔과 다리에 약간 근육도 잡히는 듯하다. 또 엎드렸다 일어나느라 코어에 힘을 주게 되니 자세도 좋아지는 기분이다. 근육이 생겼다 여겨지는 건 기분 탓이려나.
108배를 마치고 한동안 절집 주변 사진도 찍고, 천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도 듣고,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오리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에도 남자는 그 자리에 서서 계속 기도를 했다. 우리가 옥천암에 왔을 때도 그 자리에 서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108배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 있었고, 108배를 마치고 난 뒤에도 망부석처럼 불상 앞에 서 있었다. 아이는 온전한 불상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는데 남자가 계속 그 자리에 서있어 원하는 구도로 사진을 찍기 어렵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는 대체 언제부터 저 자리에 있었던 걸까. 대체 무엇을 비는 걸까. 왜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하는 걸까. 온갖 물음표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지만 궁금함을 뒤로한 채 옥천암에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