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서울 백련사] 108배와 화살기도

[아이와 함께하는 천년고찰 108배 프로젝트 | 열일곱 번째 108배]

by ordinaryclip
2026. 2. 24. @서울 백련사 [열일곱번째 108배]


"버스 타고 서울 갈래?"




오전에 일이 있어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 집을 나선다. 은평에 있는 진관사가 4대 명찰 중 하나라고 하길래 광역버스를 타고 강북으로 넘어가 진관사에 가보자 했다. 원래는 옥수역에 있는 비구니 스님의 절이라는 미타사에 갈까 했는데 가는데 얼마 걸리지 않아 미타사는 다음에 학기 중에 가보기로 하고 겨울방학 마지막 주에는 좀 더 먼 곳으로 욕심내어 가보기로 한다.


집을 나서며 지도앱을 보니 버스를 타려면 10분 안에 정류장으로 가야 했다. 서둘러 나왔는데 하필 이사하는 세대가 있어 엘리베이터가 올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빠듯해하는 수 없이 15층에서 지하 1층까지 걸어 내려간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아파트 입구에 이사차가 출입구를 막고 있어 돌아가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불만의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아파트 현관을 나오자마자 아이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 108배로 단련한 체력으로 숨이 차도록 뛴 보람이 있다. 방학 동안 하던 야구도 멈추고 108배만 하러 다녔는데 아이가 전보다 빨리, 힘차게 뛰어서 놀랐다.




평상시라면 막힐 리 없는 경부고속도로인데 오늘은 차들이 많다. 버스전용차로는 웬만해서 막히지 않는데 정체도 아니고 아예 버스가 선다. 차 안에 승객들이 웅성대기 시작하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빼고 창밖을 본다.


사이렌 소리가 나더니 급히 경찰차와 소방차 두 대가 간다. 반대쪽 차선으로 소방차 세 대가 지나가길래 반대편에서도 불이나 사고가 났나 싶었는데 반대편 차선을 지나던 119가 다시 돌아 이쪽 차선에 합류했다. 조금씩 움직여가다 보니 아까 간 경찰차가 도로를 사선으로 막고 휀스 역할을 해주고 있었고 소방차들도 그 근처를 에워싸고 있었다.


버스전용차로에 버스 세 대가 추돌해 있고 한대는 앞유리가 크게 깨졌다. 소방차가 다섯 대나 올만큼 누군가 크게 다치거나 엄청난 사고로는 보이지 않아 무슨 일인가 했는데 조금 더 가다 보니 승용차 두 대가 크게 충돌했는지 반파되어 도로 3개 차로를 점유하고 있었다.




아이가 엄청 놀라서 보고 있길래 승용차 추돌 장소를 지날 때에는 아이 눈을 가리고 보지 말라 일렀다. 부디 큰 사고가 아니기를. 108배를 하러 가면서 짧게 화살기도를 한다.


무늬만 천주교인 내가 천주교의 의식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화살기도다. 화살을 날리듯 짧은 기도로 소원을 비는 의식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다음 좋아하는 것은 미사 때 처음 보는 사람들을 향해 인사하는 "평화를 빕니다."다. 다짜고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보다 과하지 않아서, 담백해서 좋았다.




사고 장소를 벗어나자 버스는 텅 빈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사고 여파로 도로에 차가 많지 않아 남산 터널을 넘기 전까지 막힘없이 갔다. 환승 정류소에서 내려 진관사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배차간격이 어긋났는지 15분 뒤에 왔다. 주말보다 많이 추워져서 기다리는 동안 몸이 덜덜 떨렸다.


갈아탄 버스를 타고는 진관사까지 돌고 돌아 50분을 가야 했다. 너무 먼 거 아닌가 싶어 진관사는 다음에 오기로 하고 오늘은 근처에 있는 다른 가까운 절들을 둘러보자 했더니 아이가 좋단다. 그래서 진관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 경로를 급히 변경했다.


진관사 대신 서대문 근처에 찍어둔 천년고찰 중 묶어서 갈만한 백련사와 봉원사를 가기로 한다. 갈아탄 버스가 백련사 근처까지 가길래 근처에 내려 백련사가 종점인 마을버스를 갈아탔다. 지독한 길치인 나도 이제 어느 정도 도가 터서 갑작스러운 행선지 변경에도 당황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됐다.




홍제동은 처음인데 재미있는 곳이었다. 서울인데 서울이라고 하기에 예스러움이 많이 남아있어 생경했다. 전봇대와 전신주들이 도로마다 걸려있고, 어르신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정류장 근처에는 분식집, 꽈배기집, 청과물 가게 같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어 오랜 마을을 들여다보는 느낌. 마음이 몽글몽글, 정겨움이 피어올랐다.


이 동네에는 심지어 폭포도 있다. 마을버스가 홍제 폭포 정류소를 지났는데 홍제천 근처에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들이 있는 게 아닌가. 자연 폭포가 있는 마을이라니. 서울이 아닌 어디 멀리 외딴 지방을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백련사 앞 마을버스의 종점에서 내린 사람은 아이와 나 둘 뿐이다. 아이는 언제나 버스를 타고 내릴 때 큰 소리로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기사님들이 그런 아이를 보며 늘 인사에 화답하거나 웃어준다. 아이를 따라 나도 덩달아 큰소리로 인사한다.




백련사는 민가에 둘러싸여 있었다. 꽤나 높은 지대 위에 지어져 있어서 절 입구에서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마을버스를 타고 경사를 한참 올라왔는데 이렇게까지 높이 올라온 줄 몰랐다. 눈이 오면 올라오기 힘들 것 같았다. 한 겨울에 온 게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747년 신라 경덕왕 때 서대문 백련산 자락에 창건된 백련사는 조선시대 정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후 요양차 머무른 곳이란다. 이후 세조의 딸인 의숙옹주가 스무 살에 남편이 죽고 방황하다 백련사의 엄나무를 보고 깨달음을 얻은 후 백련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백련산이라는 이름이 백련사에서 유래했단다.


백련사라는 명칭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옛날에는 경복궁 서쪽에 위치해 서방정, 정토사라고 불렸는데 어느 날 연못에서 갑자기 하얀 연꽃이 피어올라 백련사라고 바꾸었다는 설이 있단다. 천년고찰에 담긴 전설은 언제 들어도 재밌다.




아담한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보물이라는 동종도 보고 무량수전에 들어간다. 주말보다 기온이 떨어져 바닥도 차고 방문객도 없어 경내가 싸늘하다. 아무도 없는 어둑한 전각 안에서 익숙한 듯 좌복을 찾아 자리를 잡는다.


108배를 시작할 때는 분명 손도 시리고, 발도 시리고, 코도 시리고 귀도 시렸는데 열 배, 스무 배, 서른 배 이어나갈 때마다 손발에 온기가 돌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늦겨울에 하는 108배의 묘미다.


게다가 벌써 열일곱 번째 천년고찰이라서 그런지 108배를 하는 게 전처럼 고되거나 힘들지 않다. 자세도 호흡도 속도도 요령이 생겨서 훨씬 편해졌다. 가뿐하게 108배를 마치고 무량수전을 나온다.




처음 108배를 시작할 때는 어디서 절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사람이 없으면 돌아가야 하는지,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하는지 엄청 고민했었는데 이제는 안다. 아무도 없어도 대체로 대웅전은 문이 열려 있고, 누구나 와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도 된다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절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있는 것 같다. 다른 종교에 비해 더 개방적이고, 더 유연하고, 더 품이 넓은 느낌. 덕분에 오늘도 편안한 마음으로 108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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