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하는 천년고찰 108배 프로젝트 | 열다섯 번째 108배]
"여기가 훈민정음해례본의 본향인 거 알고 왔어요?"
봉정사가 있는 인근에는 천년고찰이 2개 더 있다. 광흥사와 개목사. 둘 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란다. 광흥사는 전에 찍어둔 곳인데 개목사는 봉정사를 가다 봤다. 이 산엔 이상하게 절이 많다. 풍수지리적으로 영험한 곳인가.
봉정사를 나와 어딜 갈까 고민하다 과거 이 근방 최대 사찰이었다길래 광흥사에 가기로 한다. 개목사는 봉정사에서 직선거리로는 800m라 산을 타고 가면 걸어서도 가겠는데 봉정사를 나온 시각이 이미 5시가 넘어서, 산을 타고 갔다간 해가 지면 못 돌아올 것 같아서 포기하기로 했다.
광흥사로 가는 길에 마을 사이로 계속 논밭이 이어졌다. 이제 막 새로 농사를 준비하려는지 밭마다 거름을 잔뜩 가져다 쌓아두어 고향의 냄새가 난다. 같은 거름이라도 냄새에 따라 종류가 다른지 지날 때마다 저마다의 고약한 냄새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소똥냄새는 양반이다. 계분은 좀 더 역한 것 같은데, 이도 저도 아닌 처음 맡는 냄새는 정말 오심이 날 정도로 비위가 상했다. 문을 열고 가면서 거름냄새가 날 때마다 웩웩거리니 아이가 깔깔 대고 웃는다.
굽이진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길이 하나로 줄어든다. 앞서가던 트럭이 천천히 달려서 덩달아 세월아 네월아 트럭 뒤꽁무니를 따라 천천히 달린다. 평소라면 앞차 속도가 답답하게 느껴져 추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을 텐데 급할 게 없는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뒤를 따른다. 덕분에 마을 구석구석 구경하며 가기 좋았다.
절에 가까워오자 경사도 심해지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라 신경이 곤두섰다. 속도를 낮추고 조심조심 길을 오르는데 눈앞에 오래된 일주문이 나타났다. 일주문 근처에는 옷 벗은 거대한 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검색해 보니 400년 넘은 은행나무로 가을이 되면 이 나무를 보러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오나 보다. 마지막 경사로를 힘겹게 올라가자 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돌아갈까?"
이 근방 가장 큰 사찰이라던 광흥사는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고 절 앞에 백구 한 마리만 있었다. 들어가도 되나 싶어 주저하다 그냥 돌아갈까 했다. 해가 거의 떨어지고 있는 산중의 외딴 절이라 남편은 차에 있겠단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가기 그래서 아이와 얼른 108배만 하고 오겠다 하고 들어갔다.
작은 마당에는 크지 않은 전각들이 ㅁ자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대웅전 자리에는 '응진전'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각이 있었는데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들어가도 되는 건가 싶어 머뭇거리며 근처를 서성이고 있을 때 마침 법당 안에서 안경 쓴 스님이 나오셨다.
스님께 합장을 하고 아이와 천년고찰을 다니며 108배를 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고 108배만 금방 하고 가도 되냐고 했더니 아이더러 몇 학년이냐고 물어보신다. 기특하다고 절하고 차도 한 잔 하고 가라 하신다. 여기까지 왔으니 절에 대한 얘기도 해주고 역사에 대한 얘기도 해주신다고.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광흥사는 원래 안동 지역에서 규모가 큰 사찰 중 하나였는데 1946년에 불이나 대웅전이 소실되고, 1954년에는 극락전이 무너져 지금은 응진전이 주요 법당이 되었단다.
응진전 안은 다른 절의 대웅전이나 극락전과 다르게 중간에 부처님 상이 있고 벽면에 빙 둘러 나한상이 있었다. 주요 전각들이 화재로 소실되고 응진전이 여러 전각의 역할을 하느라 그런 건가 싶었다.
가운데 놓인 불상 주변으로 사람이 다닐 정도의 공간만 있어 둘이 절을 하기에는 좁았다. 아이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좌복을 깔고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절을 했다. 공간이 주는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스님이 기다리고 계셔서인지 아이도 나도 말없이 108배에 집중했다. 덕분에 평소보다 빨리 108배를 마쳤다. 응진전에서 나오니 스님이 다원으로 오라신다.
"<나랏말싸미>란 영화 봤어요?"
스님이 광흥사가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된 곳이라며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6년이나 앞서 스님들이 이미 쓰고 있던 한글을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집대성한 거라고 하셨다. 처음 듣는 얘기인데 2019년에 <나랏말싸미>라는 영화에 나왔단다. 못 봤다고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했다.
차나 한 잔 하고 가라던 스님은 아이에게 한글 창제에 대해 가르쳐주고 싶은 게 많으신지 계속 말씀을 이어가셨다. 그런데 아이가 다원 통창 너머로 어두워지는 사위를 자꾸 확인하기 시작한다. 아이의 걱정하는 낯빛을 눈치채시고는 스님이 설교를 끝내셨다.
산중이라 해가 빨리져 어느덧 캄캄해졌다. 운전하는 길이 익숙하지 않아서 해가 지면 내려가기 어려울 것 같다 했더니 아쉬워하시면서 얼른 가라 신다. 천년고찰에 108배를 다니면서 스님과 차를 마시며 말씀을 나눈 경험은 또 처음이라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은 말씀을 더 들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온다.
"말씀도 차도 정말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오면서 스님께 감사하다 인사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 말씀드렸더니 스님이 신발을 고쳐 신는 아이를 불러세우셨다. 그러더니 새해라며 아이에게 용돈을 주신다. 괜찮다고 손사래 치는 아이에게 스님이 계속 주시려고 하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를 하고는 수줍게 용돈을 받았다.
"이거 받아도 되는 거야?"
차로 돌아와 보니 아이 손에 신사임당이 고이 쥐어져 있었다. 뜻밖의 상황에 어쩌지 하며 난감해하는 아이에게 내일 부석사에 갈 거니 부석사에 가면 스님께 받은 용돈을 시주하자 했다. 그래, 그러면 좋겠다며 엄마가 스님의 용돈을 맡아달라며 신사임당을 건네준다. 당황하던 아이 얼굴이 금세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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