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양평 용문사] 천년 넘은 은행나무가 사는 절

[아이와 함께하는 천년고찰 108배 프로젝트| 열세 번째 108배]

by ordinaryclip
2026. 2. 20. @용문사 | 열세번째 108배]


"천년 넘은 은행나무 보러 갈래?"




어제 자기 전 오늘은 양평 용문사에 가자고 했다. 천년 넘은 은행나무를 보러 가자고. 나무 한 그루가 천년이 넘었다기에 아이가 호기심을 보인다. 얼마나 큰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 했다.


용문사 가는 길을 찾아봤는데 차로 가는 게 아니면 지하철과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3시간쯤 걸린다. 청량리역에서 경의중앙선을 타고 용문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용문산 정류장에 내려 30분쯤 걸으면 용문사가 있단다.




"용문사 가려면 좀 멀고 힘든데 괜찮겠어?"

아이에게 산 넘고 물 건너가야 하는 길이라고 얘기했다. 차로 가면 1시간이면 갈 수 있다는 얘기도 했다. 대신 엄마가 운전을 하면 오늘 중으로 못 갈 수도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던 아이는 조금 주저했다. 그러더니 엄마가 운전하는 차 대신 대중교통으로 가보겠단다. 경의중앙선도 타고 양평에서 마을버스도 타야 한다고 하니 경의중앙선을 타 본 적 없다고 한번 타보고 싶다 했다.


108배 프로젝트를 하면서 아이가 전보다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것에 대해 많이 유연해진 듯하다.




8시에 일어났는데 미적대다 9시쯤 느리게 준비를 시작한다. 먼 길을 떠나야 해서 떡국을 끓여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나갈 채비를 한다. 다행히 평소보다 날이 따뜻한 편이라 걷기 좋았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한 시간 반 만에 용문역에 내렸다. 한 시간 반이면 서울에서 대전까지 KTX나 SRT를 타고 가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리는 시간이다. 분명 경기도 안에서 움직이는 건데. 새삼 경기도가 참 크구나 생각한다.




용문역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니 역 앞은 천막들이 도로를 막고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용문시장 장날이란다. 변변한 상설시장도 없는 동네에 사는 아이와 나는 우와, 우와 하며 도로를 가둑 메운 사람들과 장날에 나온 물건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을 판다.


시골 5일장 구경도 하고 밥도 먹고 가면 좋은데 버스 시간이 어떨지 몰라서 일단 용문사에 다녀온 뒤에 구경하기로 한다. 맵이 안내하는 대로 원래 서던 정류장에 갔더니 어르신들이 여기 버스 안 선다며 한 블록 더 가서 타라고 알려주셔서 걸어서 버스를 타러 간다.




정류장을 헤맬 때마다 주변에 묻고 답을 얻어 찾아간다. 휴대폰 지도앱에만 의지하는 것보다 이렇게 묻고 찾아다니는 게 나름 재미있다. 완전한 이방인이 된 기분. 지방은 수도권처럼 지도앱의 버스 정보가 정확하지 않기도 하고 현지분들께 여쭤보면 엄청 친절하게 알려주셔서 아이도 나도 감사할 때가 많다.


용문역 어르신들이 알려주신 정류장에 가서 다시 다른 분께 물었더니 여기서 서는 거라고 본인도 용문사 가려고 기다리는 거라고 안심시켜 주신다. 그런데 시간이 되어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타려던 버스가 용문사로 가는 마지막 버스여서 버스를 놓치면 계획한 일정이 꼬이게 된다.


다행히 두 시에 온다는 버스는 조금 늦게 왔다. 게다가 반대편에서 버스가 오는 바람에 반대편 정류장으로 뛰어가 버스를 탔다. 허겁지겁 버스에 올라 아이와 깜빡 놓쳤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안도하고 있는데 버스가 로터리에서 돌아 원래 서있던 정류장을 찍고 용문산으로 향했다.




시골 버스를 타고 가는데 기분이 좋았다. 아침에 속이 좋지 않아 텀블러에 싸 온 커피를 마시지 못해 머리가 살짝 아프기 시작했지만 이제 막 봄이 움트는 버스를 타고 덜컹이며 조붓한 시골길을 달리니 기분이 몽글몽글 해졌다.


버스에는 아까 정류장에서 같이 탔던 분과 어르신 예닐곱이 타고 있었다. 아이도 이렇게 뚜벅이로 여행하는 맛을 알아가는지 중간중간 서는 정류장을 눈으로 더듬으며 어디서 내려야 할지 보기도 하고 창밖에 생경한 풍경을 보면서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낸다.





한참을 구불구불한 시골 동네 길을 달려 용문산 정류소에 도착했다. 정류소 주변으로는 산채 정식이나 두부요리 같은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즐비했다. 용문사로 오르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지만 양평역 주변처럼 붐비지는 않았다.


지도앱에서는 버스정류장에서 용문사까지 걸어서 30분이라고 했는데 나와 아이의 걸음이 원체 빨라서 15분 만에 도착했다. 용문사에는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봤던 것보다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평일 오후라 너무 왁자지껄하지 않고 조용했다. 산 아래 앉은 용문사는 평화로워 보였다.





신라 913년에 창건되었다는 용문사가 유명한 건 1100년 된 은행나무 때문인데 가서 보니 정말 영이 사는 것처럼 엄청 큰 나무가 헐벗은 채 굽어보고 있었다. 천연기념물인 용문사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란다.


이 은행나무의 기원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통일신라 시대 때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고 실의에 젖어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하나는 의상대사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가 있었는데 그것을 꽂아 놓은 곳에 나무가 자라 이 은행나무가 됐다는 설이 있다.


거대한 은행나무 옆으로는 오래된 절에는 어울리지 않는 엄청 큰 탑이 있었는데 찾아보니 피뢰침탑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나무가 1100살이 넘어가다 보니 날이 궂은날 벼락에 맞아 불타는 걸 막기 위해서란다. 신경 써 보호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나무를 둘러보고는 경내로 올라간다. 사천왕문에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눈앞에 대웅전이 나타났다. 대웅전 오른쪽으로는 밋밋하고 거대한 돌벽에 조각된 불상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사람들이 그곳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도 밖에서 108배를 하기로 한다. 보문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방과 옷을 옆에 벗어두고 빈 좌복 위에 선다. 손을 모아 합장을 해 인사를 하고 절을 하기 시작한다. 절을 하는데 바람이 불어서인지, 밖에 있어서 그런지 고무매트로 만들어진 좌복에 손을 대니 흙이 만져졌다. 바닥이 돌이라 딱딱해서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하다 보니 또 할만했다.


"안 되겠어. 나는 안에서 마저 하고 나올게."

108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돌로 된 바닥이 너무 딱딱해서 절을 하기 힘들다고 했다. 아무래도 밖에서는 50배만 하고 나머지는 대웅전에 가서 하고 와야겠다고 했다. 밖에서 50배를 마친 아이는 대웅전에 혼자 들어가 나머지 108배를 하고 나왔다.




108배를 하고 났더니 개운했다. 온몸에 피가 돌면서 땀이 흘렀다. 바람이 불어 땀에 스치자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층간소음으로 고통받고 미워하던 마음들이 모인 번뇌가 조금은 내려놓아진 듯한 기분.


절을 하는 동안 아들 둘의 무사를 기원하는 경상도 사투리를 하는 부부가 초를 켜고 갔고, 내 옆으로 가벼운 절을 하고 가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신발을 고쳐 신자 비슷한 시각에 108배를 마친 아이가 대웅전에서 나왔다. 사뭇 의젓해 보였다.


세상천지 어느 만 9세가 저렇게 스스로 알아서 절을 할까. 분명 그 누구도 시킨 적이 없는데. 직접 경험해 보니 108배는 아무나 쉽게 하는 수행이 아닌 걸 알기에 더 대단해 보였다. 어쩌면 누가 시켰더라면 이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절에 따로 시주는 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나는 천주교인이니까. 대신 절에 가면 되도록 차라도 한잔 마시고, 뭐라도 하나 사려고 한다.


시주 대신 용문사 아래 있는 찻집에 들러 차 한잔하고 숨을 돌린다. 찻집에서는 십전대보탕 같은 냄새가 났다. 아이는 수제 식혜를 주문하고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속에 탈이나 수분섭취를 제대로 못했더니 갈증을 해소할 차가운 게 먹고 싶었다.


찻집 밖에 나가 앉아, 산등성이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아이는 식혜에 잣이 3알이나 떠있다고 맛있다고 했다. 아이가 휴대폰을 열어 14번째 108배 천년고찰을 기록했다. 그러고는 참 좋다고 했다. 행복하다고. 나도 참 좋다고 했다.


아직 차지만 봄을 품은 바람도 좋고, 찻집 아래 계곡 얼음 아래로 물 흐르는 소리도 좋고. 뉘엿거리는 해도 좋고. 모든 것이 다 균형 있고 완벽했다.




https://brunch.co.kr/@ordinaryclip/29

https://brunch.co.kr/@ordinaryclip/15

https://brunch.co.kr/@ordinaryclip/28

https://brunch.co.kr/@ordinaryclip/14

https://brunch.co.kr/@ordinaryclip/13

https://brunch.co.kr/@ordinaryclip/20


작가의 이전글20. [의왕 청계사] 층간소음에서 해방되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