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칼한 하루
“사람은 기술을 배워야 돼.”
해외배송으로 구매한 하늘색 글러브를 챙기며 대리님은 말했다. 글러브는 일본의 한 장인이 만든 것으로, 가격은 오십만 원 정도라고 했다. 복싱을 시작한 지 한 달이나 지났을까. 초보자가 쓰기엔 좀 과한 것 아닌가 싶었지만, 디자인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유독 ‘간지’를 중시하는 대리님이었다.
대리님은 나도 같이 복싱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며 제안했다. 생각보다 운동량이 많다, 스트레스가 풀린다, 체육관에 연예인 누가 다닌다 등 설득의 레파토리는 다양했지만, 어느 것 하나 나의 구미를 당기는 것은 없었다. 다만, 헬스장에서 런닝머신만 뛰다 오지 말고 뭔가 배워서 남는 걸 해야 한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나는 꽤 오랫동안 헬스장을 다녔다. 대단한 몸짱이 되겠다는 포부 같은 것은 없었고, 일종의 의무감 같은 거였다. 사실, 가성비만 놓고 보면 헬스만 한 운동은 없었다. 한 달에 3만 원씩 36만 원에 운동시설과 샤워시설을 1년 내내 이용할 수 있고, 아침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원하는 시간 언제라도 운동이 가능했으니까. 야근이 많고 출퇴근이 불규칙적인 나에겐 헬스만 한 운동이 없었다.
정시 퇴근을 예상해도 퇴근시간 5분 전 갑자기 일이 들어오는 날이 허다했다. 기한은 내일 아침까지. 급하게 회의가 잡히고, 한번 시작한 회의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러니 운동 시작 시간이 정해져 있는 종목은 애초에 선택지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밤늦게까지 이용할 수 없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면에서 헬스는 나에게 최적화된 운동이었다. 시작 시간도 끝내는 시간도 내 맘대로 조정할 수 있는 편리함에, 함께보다 혼자가 편한 내게 남과 섞이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까지 고루 갖췄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사람은 ‘배워서 남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대리님의 말이 자꾸 맴돌았다. 어쩌다 일이 지치고 힘들 때면 진작에 기술 하나 배워둘 걸 그랬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그날의 농담은 그냥 농담으로만 남진 않았다. 당장 뭔가를 배울 수 있다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지금 당장 뭔가를 시작하기는 어렵겠다는 핑계로 끝나긴 했지만, 그 생각은 바쁜 일상 속에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고개를 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