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겠습니다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팀원이 팀장을 호출하는 경우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퇴사.
계속되는 프로젝트에 많이 지쳐있던 출근길, 이어폰을 꽂고 회사앞까지 이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어쩐지 그날따라 노래 가사가 날카롭게 박혔다. 그날 출근길 플레이리스트는 이센스의 독.
노래에 잠시 홀린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참아왔던 것이 욱하고 치밀어 오른 것인지. 지각생인 내가 팀장을 보고 처음 건냈던 말은 ‘안녕하세요’가 아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였다. 그 한 마디에 사무실은 얼어 붙었고 팀원들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지만 귀는 내쪽으로 향해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회의실에 마주 앉은 팀장과 나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무슨 일 있니. 그만두려고요. 요즘 힘들어 보이긴 하더라. 이 일을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뭘 해줄 수 있을까. 없을 것 같아요. 다음 스텝은 생각해 놨니. 일단 쉬면서 생각하려고요. 회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팀장은 내게 자신도 그럴 때가 있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박차고 나가면 잠깐은 좋지만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할 때가 오면 내가 원하는 회사가 아니라 나를 받아주는 회사로 급하게 갈 수 밖에 없더라고. 그러니까 회사를 그만두고 싶으면 가고 싶은 다음 회사를 구하고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한참 이어지던 대화는 귀결점을 찾지 못했고 팀장은 내게 쉬면서 마음 좀 추스리고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렇게 제주 백패킹 여행이 시작됐다. 제주 곳곳을 걸으며 발길 닿는 곳에 텐트를 치고 맥주를 마시다 잠드는 시간이 계속 됐다. 하루는 올레길 표지를 따라가다가 어느 마을에 다다랐는데 그곳은 벽화가 많이 그려진 곳이었다. 그중 인상적이었던 벽화는 하얀색 콘크리트 벽에 해녀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옆에는 ‘바랑에설랑 욕심내지 말고 숨 참을 수 있을만큼만 하라’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한번에 많이 잡으려고 무리해서 잠수하지 말고 숨 참을 수 있을만큼만 버티다 나오라는 이야기겠지.
나도 어쩌면 주어진 능력보다 더 욕심내어 일하다보니 숨이 막혔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라도 더 많이 손에 움켜쥐려고 숨을 참고 아둥바둥했지만 내 한계는 거기까지였나 보다. 살고 싶어서 물 밖으로 나오려고 했나 보다. 중간중간 밖으로 나와 숨도 쉬어주고 했어야 했는데 너무 오래 나를 방치해뒀나 보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퇴사를 하지 않고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때 그만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과 그때 그만두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공존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가끔 숨이 턱턱 막히기도 하지만 그럴때면 욕심내지 않고 틈틈이 물 밖으로 나와주고 있다. 일에 파묻혀 숨가빠할 때면 벽화 속 해녀가 내게 말하는 것 같다.
바랑에설랑 욕심내지 말고 숨 참을 수 있을 만큼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