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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jo Feb 05. 2021

시간과 물량이 가족을 파괴하는 법

<미안해요, 리키> 리뷰


<미안해요, 리키>의 감상을 세 가지 경험으로 대신한다.



첫 번째 공감. 나의 아버지는 택시기사다.

어느 새벽의 일이다. 평소보다 일찍 집에 온 아버지는 매우 상기되어 있었다. 듣자하니, 택시 요금을 두고 내 또래 사람과 싸웠다는 소리였다. 어머니는 달랬지만 아버지께선 내내 씩씩댔다. 당시 우리 가족은 18평 남짓 작은 공간에 살았다. 부모님께서는 자식들에게 방을 내어주고 거실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거실에서 나누는 대화는 나와 동생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런 일이 종종 있을거라는 건 알았다. 다만, 현실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는 몰랐다. 안다한들 나가서 말하는게 도움이 되었을까. 모른척하는게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정말로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은 묻어두고 살기 마련이다. 나는 리키가 강도들에게 맞는 장면이 고통스러웠다.


두 번째 공감. 나의 어머니는 식당을 하신다.

어머니께선 새벽 6시에 일어나 식당 문을 연다. 그리고 매일 9시에 집에 돌아온다. 가끔 단체주문이 들어올 때는 온 가족이 동원된다. 주말에 나도 일찍 일어나 새벽에 일을 도왔다. 학교에서 돌아와 일을 도울 때도 있었다. 철든 착한 아들이어서 군말 없이 도왔으면 좋았겠다. 난 사실 그게 정말 싫었다. 친구들과의 약속을 깨야할 때도 있었고, 늦게까지 노는 것을 포기해야할 때도 많았다. 내 주제에 할말은 아니다만 공부할 시간을 뺏긴다고도 생각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점심이 되면 택시 일을 하시다가 돌아와 식당의 점심 배달을 했다. 아버지께선 시간을 맞춰와야하니 일의 흐름이 끊어진다고 말했다. 나도 아빠도 엄마도 항상 그런 얘기들로 자주 싸웠다. 내말도. 아빠말도. 엄마말도 맞았다. 엄마와 식당이란 그런 존재였다. 우리 가정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이며 헌신하는 존재. 그러나 헌신할 수록 가정을 무너뜨리는 존재. Abby의 말처럼 발버둥 칠 수록 늪으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세 번째 공감. 내 동생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누가 흑화할까. 올바른 양심, 점잖은 태도, 넓은 아량. 나는 돈으로 부터 나온다 굳게 믿는다. 물론 가난한 사람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무척이나 강한 의지와 부침을 견딜 멘탈이 필요하다. 가난한 이는 흑화하기 쉽다. 흑화를 부추기는 상황들이 도처에 널렸기 때문이다. 우리집도  <미안해요, 리키>같은 불화를 수년 겪었다. (정도가 나아졌을 뿐 사실 지금 역시 그것이 없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생이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우리 집에서 너같은 성격이 나온게 신기하다." 우울해져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인데 그 와중에 이상하게도 잘 자랐다는 나름의 덕담이었다. 왜 이렇게 자랐을까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다. 나는 다 그런줄 알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어쩌면, 정말로 우리집만 진짜 불행한 거라면. 새벽에 돌아온 아버지처럼 잘 외면하는게 나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도 묻어두고 사는게 득이기 마련이다.


정해진 결과로 나아가는
가난한 이의 삶

다르덴 영화도 그렇지만 켄 로치의 영화에서 탁월하게 느끼는 건 '개연성'이다. 등장 인물이 '그럴 수 밖에 없는' 합리적인 상황을 설정한다. (설정한다는 것은 어폐일지 모른다. 현실의 도처에 널린 일이니까) 가난한 집에 산다. 아들이 불량아가 된다. 아빠와 싸운다. 아빠가 택배기사를 하게 된다. 쉴틈 없이 일한다. 대화를 하며 의견을 좁힐 사시간이 줄어든다. 가정 전체의 불화가 찾아온다. 이게 정말로 우연이고 선택의 여지가 있는 전개일까. 내가 너무 구조주의적으로 사고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삶은 그들 모두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모두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에 가깝다. 정해진 결과로 나아가고야 만다.


매뉴얼의 빈 칸은
누가 채우나

Abby는 건바이건으로 수당을 받는 노인돌보미다. 하루에 5명을 돌봐야하는데 차도 없는 신세다. 누가봐도 소화하기 빠듯한 일정이다. 그런 와중에도 Abby는 노인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며 최선을 다한다. 노인들은 그녀의 사정을 알지만 관심을 더욱 갈구하며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나 자본은 감정이 없다. 택배든 돌보미든 하루의 건수와 시간이라는 정해진 데이터로 Abby를 평가한다. 그런 와중에서 진짜 돌봄을 하는 돌보미가 나올 수 있나.


사람을 대하는 일은 데이터와 매뉴얼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노인들을 가서 씻기고 재운다' 는 미션은 30분만에 끝날 수도 있지만, 3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노인이 슬퍼할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고 짜증을 부릴 수도 있다. 변수는 셀 수 없이 많다. 매뉴얼은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법이 나와있지 않다. 그저 시간과 건수만을 요구할 이다. 매뉴얼이 채우지 않은 공백은 누가 메꾸는가. 다름 아닌 노동자 개인의 양심에 맡길 뿐이다. 건조한 매뉴얼을 따뜻하게 바꾸는 힘은 오직 노동자에게 있지만, 매뉴얼을 따랐을 때 감당해야하는 자책 또한 노동자의 몫이다. 아이러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하지만, 일하다보니 가족을 잃는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일하지만, 일하다보니 사람을 잃게 된다.

우리집 식당처럼. 우리는 먹고 살려다 애초에 찾으려 했던 길을 잃어버린다.



섹스를 하자는 남편의 말에 abby는 위와 같이 말한다. 때론 체크리스트는 인간이 '일'이라는 운영 프로그램처럼 돌아감을 증명하는 물증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일, 심지어 감정마저도 정렬하고 처리하는데 일처리하듯 사고한다. 경제적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은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모든 것을 일에 지배당한다.


보스는 천하의 개새끼가 아니다

나는 천하의 개새끼가 아니라는 보스의 항변은 매우 옳다. 우리는 이렇게 개새끼가 되지 않으려고 괴로워 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위치까지 오르지 못해 괴로워 한다. 이 두 가지는 분리할 수 있을까. 당장 한명이 비면 택배가 돌아가지 못하는 예비인력도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남의 사정 다 봐주면서 살아야할까. 그는 시스템을 매우 충실하게 수행하는 인물이다. 나는 우리는 정말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나.



실로 싫고, 불편한 영화다. 그의 모든 영화들이 그랬다.

이 영화를 다시 연출하기 위해 켄 로치 감독은 은퇴를 번복했다. 이유는 제대로 찾아본 적이 없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시궁창 같은 현실을 보는 것도, 그것에 대해 얘기해도 달라지는 게 없는 것도 지쳐버렸다. 하지만 막상 시궁창 같은 삶이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나자 다시 카메라를 들 수 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저런 삶은 "에라이 그냥 편히 살다 가자." 하다가도 도통 눈에 밟히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은퇴 번복은 대충 참고 넘어가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여유가 있으면, 경제적 자유를 얻으면 이라고 은근슬쩍 미룬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당장이 아니면 실현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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