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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jo Feb 01. 2021

<소울>이 재밌었다면 이 영화도 한 번

지겨운 정서도 픽사가 하면 다르다

내가 주위에서 크게 느껴온 정서는 'LOVE YOURSELF'였다. 나는 그 말이 썩 맘에 들진 않았다. 매우 무책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해는 갔다. 국정농단, 조국사태 등으로 공정과 평등함의 가치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고, 노력을 강요 받았지만 시작점이 다르고 아무리해도 오를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절감했으며, 무엇보다 성과주의와 노오력으로 가속화된 자기착취에 지쳐버린 세대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개차반이여도 너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는 매우 달콤한 말이 틀림없다.


근래 이 정서는 모양새만 바꾸며 내 주위(청년세대)를 배회한다. 메세지는 같은데 겉모양만 바꾸는 식이다. 처음엔 '괜찮아' '따뜻한 위로' 등의 키워드를 사용하며 토닥토닥류로 시작했던 것이, 근래에는 '아무 것도 안 하면 어때' 식의 자기비하+뻔뻔함으로 모양새를 바꿨다. 건방진 평가지만 솔직히 이러나 저러나 시시했다.


소울도 같은 메세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혀 다르게 읽혔다.

오그라들고 무책임하다 여겼던 '토닥토닥' 정서에 부화가 치밀던 나도 <소울>에 녹아버렸음을 고백한다. 역시 같은 얘기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해질 수도 안 전해질 수도 있나보다.

<소울>을 보며 떠오른 생각을 두 가지 영화와 함께 간단히 정리해볼까 한다.


패터슨
빨래방에서 랩하는 메소드맨에게 "여기서 연습해요?" / 아무데서나 생각나면 연습하는 거지

<소울>의 조 가드너는 중학교 선생님임과 동시에 재즈 피아니스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해석한다. "내 꿈은 피아니스트인데, 이루지 못해 중학교 밴드부 선생을 하고 있는거야" 자신의 삶의 목적을 피아니스트로 두고 밴드부 선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긴다.


<패터슨>의 패터슨은 버스기사다. 그는 버스기사를 하며 틈틈히 시를 쓴다. <패터슨>에선 이런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에펠탑의 기상학자이자 미술가인 장 뒤비페, 빨래방에서 랩 연습을 하는 메쏘드 맨, 엄마를 기다리며 시를 쓰는 꼬마.


빨래를 하든 버스기사를 하든 밴드부 선생을 하든간에. 인생과 불꽃은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이미 그 일을 잘 수행하고 있다. 책을 내야 꼭 글쓰기의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재능이 없어도 봐주는 사람이 거의 없어도 이렇게 시간을 또 허비하고 있지 않은가. 삶은 목적이 아닌 과정 자체에 즐거움이 있다.


원더풀 라이프

<소울>의 조 가드너는 생을 마감한 후, 요단강을 완전히 건너기 전에 삶을 돌아본다.

<원더풀 라이프>의 사람들은 꼭 한번 재현하고 싶은 마지막 기억을 찾는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내 세계에서 죽어버린 사람들)을 기억해본다. 같이 놀러갔을 때 일, 환갑잔치 했을 때 할아버지의 모습 그런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나는 그저 함께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던 장면이 가장 뚜렷히 기억에 남는다. 다시 경험하고 싶고, 계속 꺼내어 보고 싶은 장면이란 그런 게 아닐까.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보다 평범한 어느 날이 가장 그리운 법이다. 그 순간들은 오늘 지금 이순간에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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