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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jo Oct 23. 2024

<마흔즈음에>와 언캐니

40대는 모두 <마흔에 읽는 어쩌구>를 내려놓고, 이걸 읽어야 한다


역지사지. 메타인지 

장담컨대, 세상에 이 두 가지 사자성어만 가슴에 아로새기면 세상의 갈등은 반으로 줄어든다. 니는 잘 하고 있냐고? 나 역시 당당히 세상의 갈등 확산에 한 몫 하고 있다. 


여기, 이에 관한 잔인한 만화 한편을 소개한다. 당신이 30대 후반이라면, 혹은 40대를 맞이했더라도 필히 클릭을 강권하는 바다. 40대는 모두 <마흔에 읽는 어쩌구>를 내려놓고, 이걸 읽어야 한다

마흔 즈음에 :: 네이버 웹툰


모두가 가장 충격을 받았을 장면, 아마 주인공이 거울 속 본인을 마주한 장면이었을거다. 있어보이는 말로 바꾸면, 주인공이 문득 언캐니를 발견한 순간이다. 메타인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닐까. 본디 '나'를 인지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우회가 필요하다. 내 안에 담긴 그로테스크를 발견하고 - 좌절하고 - 인정하는 '우회의 과정'을 거쳐 다시 나를 바라봤을 때, 제대로된 자아 설정(또는 연출)이 가능하다. 마치, 14세기 항해사들이 세계를 돌고난 후에야, 지네 나라의 특수성과 의미를 깨닫는 것처럼.


언캐니 개념을 설명하는 유명한 프로이트의 일화가 있다. 기차 여행을 하던 프로이트가 기다란 기차 복도를 걷던 중의 일이었다. 순간 기차가 덜컹거렸고 이내 복도 끝 화장실 문이 열렸다. 프로이트는 그 순간 저 멀리서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남자를 보았다. "참 꼴뵈기 싫은 놈이구만". 근데 이게 왠걸. 그것은 아까 열린 화장실 문에 달린 거울에 비친 프로이트의 모습이었다. 


위 만화가 이걸 알고 그린건지, 직감적으로 그린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인간이라면 한번쯤 겪는 원초적 경험이다. 이렇듯 그로테스크함이란, '혐오스러워 밀어내고 싶지만, 알고보면 비밀스럽게 내 안에 있던 것'이다. 아무리 애써 외면하려고 해도, 그로테스크는 언제든 불쑥 튀어나와 나라는 경계를 흔들어 놓기 위해 나의 경험 주위를 맴돌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이것은 공포이며 자아 경계의 위협인가. 공포는 맞을지 몰라도 때때로 위협은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기회다. 40대는 받아들여야한다. 내 주름의 공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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