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종종, 통제 너머에서 태어난다
대행사에서 기획일을 하다보면 이미지든 영상이든 만들어내야 할 때가 있다. 근데 "예술을 논하는데 어디 무슨 광고 대행사를 갖다 붙이냐"라고 싶을 수 있는데... 맞다. 그래도 나름의 하고픈 얘기가 있으니 계속 읽어봐주세요...
대행사 인간들이 '퇴사할래' 다음으로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다 "기한이 왜 이따위야", "이렇게 수정하라고? 더 구려지는데?". 주로 클라이언트의 디렉션에 관한 불만이다. 근데 이런 말을 뱉고나면 스스로 반문이 따라붙는다.
"그러면, 네 스스로는 뭘 만들어 냈는데?"
어줍잖게 소나타 형식을 빌려 풀어보자면, 라벨의 음악적 삶은 3악장으로 구성된다. 1악장은 형식성에 매몰된 라벨, 2악장은 형식성과 인간성이 교차된 라벨, 3악장은 형식성을 잃어버린 라벨이다. 1악장 부터 제시되는 '구두'라는 상징은 '삶과 현실성'을 의미하고 있는데 3악장에서 상실로 재현되며 라벨의 '기구한 음악 인생 테마'를 완성시킨다.
Ⅱ. Andante inquieto
'볼레로'는 2악장에서 탄생한다. 라벨의 기준에 볼레로는 '음악이 없는 음악'이다. 볼레로는 그가 생각하는 구조와 형식성이 수준에 미치지 못한 음악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레로'는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극찬을 받는다. 무용수도, 평론가도 볼레로에서 '관능'을 엿보았는데 이는 기존의 라벨에서 찾을 수 없던 요소였다. 라벨은 바로 그 지점을 용납할 수 없었다. 클라이언트의 시간과 쪼임의 압박 속에서 차마 다듬어내지 못한 내밀한 부분이 음악에 스며들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사고였지만, 그랬기에 라벨은 기존과는 다른 새로움을 찾아낸다. 퍼렐의 Happy 같은 힛-트곡들도 알고보면 클라이언트의 쪼임 속에서 나온 명곡이라는 얘길 숏츠에서 들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투덜거리는 대행사 인간인 나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창조의 순수한 의도와 작품의 예술성은 전혀 상관이 없다. 네가 생각하던 순수한 창작의 구조는 좀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Ⅲ. Adagio perduto
라벨의 음악 인생에서 볼레로는 어떤 곡인가.
먼저, 볼레로는 카이로스다. 볼레로는 하향곡선을 그리는 그의 음악적 형식성과 상향곡선을 그리는 인간성이 교차하는 단 한번의 지점에서 탄생한다.이로써 라벨은 평론가와 대중에게 모두 사랑받는 작곡가가 되지만, 3악장에 이르면 그 지점은 라벨에게 다시 찾아 올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예술은 종종, 통제 너머에서 태어난다.작가가 제어하지 못한 그 순간에 오히려 살아난다. 의도 하지 않은 우연성이 비집을 틈을 주는 것. 그렇게 탄생한 라벨의 볼레로는 그에게 비극이자 기적인 곡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