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화의 시대를 견디는 인간다운 최소값에 대하여
대선 토론에서 권영국이 김문수와의 악수를 거부하는 걸 보고 또 떠올랐다. 김문수라는 인간에 대해, 나는 모지람과 비열함의 레이어들이 많이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그를 설명하는 가장 큰 레이어는 지울 수가 없다.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 현재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우상이었던 사람. 그래서 김문수는 여전히 '흑화'란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흑화'라는 단어는 20년 정도 묵었지만, 여전히 생생한 단어다. 그 말은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게 아니라, 숙성을 거듭해 20년 간 일상에서 빈번히 쓰였다는 의미이며, 그만큼 사용할 상황 또한 빈번함을 의미한다. 흑화의 서사는 각종 뉴스에서는 물론, 문화 콘텐츠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커>, <더 배트맨>, <라스트 오브 어스>, 블리자드의 게임들 등등...
그렇다고 백화의 케이스가 없다는 건 아니다. 최근에 본 <진격의 거인> 라이너나 가비 브라운 같은 경우가 백화의 좋은 케이스로 떠오른다. 그러나, 흑화의 에피소드나 캐릭터들의 인기와 비교하면, 악에서 선으로 변화하는 서사는 수적으로 밀리는 게 사실이다. (이 부분은 개인에 따라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은 문장이긴 하다. 흑화와 백화의 기준도 정도의 차이로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통계를 낼 수 있는 부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쓰는 단어와 뉘앙스에서도 차이는 벌어진다. 흑화와 백화(개과천선)의 사용량 차이, "사람의 근본은 바뀌지 않아"라는 말은 백화의 서사에 대한 의심의 맥락에서 쓰인다는 점은 우리가 흑화의 케이스에 더 공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흑화가 된 케이스에서는 "그럼 그렇지"라고 낙담하는 표현을 하는 반면, 백화가 된 케이스에서는 "위선 떠네"라며 의심하는 표현을 쓴다.
악은 대체로 해명이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선을 납득시키려면 악보다 더 많은 근거와 서사를 마련해야 한다. 예컨대, 다른 대선 후보인 이재명에 대해서 또한 이런 혐의를 씌우기 좋다. 성남 시장 시절 '쌈닭'이미지 였던 이재명이 최근에는 온화하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이걸 백화로 읽는 것보다 '위선'으로 읽는 게 더 쉽다.
그래도 나는 그 상황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발견해보고 싶다.
인간이 흑화 서사에 더 공감 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더 악해지지 않으려 아등바등 버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실의 내가 '선' 때문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 일, 아등바등 붙잡고 있었던 끈을 놓고 추락해버리는 일을 스크린에서보는 건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한다.
우리가 흑화한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우리 안에도 그 어둠이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걸 보며 해방감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어둠을 건너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래도 아직 잘 버티고 있는 존재' 들이 아닐까.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대사가 떠오른다. 아무리 누가 악으로 가라고 떠밀어도, 내가 그걸 맞으며 선으로 나아갈 수는 없어도, 그 끝자락에서 아등바등 버티고 있는 것. 그건 도덕의 최소값을 견딤으로써 인간다운 하루를 살았다는 증거다.
너무 나이브한가. 그래도 가끔은 그렇게 나를 위로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