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하고 남을 구한 검은 모세 해리엇 터브먼
2016년,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해리엇 터브먼이 20달러의 새로운 얼굴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이 발표는 없던 일이 되었지만 2024년 11월 해리스가 대통령이 되면 다시 진행될지도 모릅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해리엇>은 바로 이 20달러의 새 모델이자 흑인을 기리는 첫 우표의 주인공인 해리엇 터브먼에 관한 실화 영화입니다. 해리엇 터브먼, 우리에겐 아직 낯선 이름의 그녀가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우표도 나오고, 영화도 나오는 걸까요?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1800년대 초, 미국 남부와 북부는 갈등이 점점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목화 농사를 짓던 남부는 노예를 소유물로 인식했던 반면 이미 산업화가 시작된 북부는 노예를 노동자로 대했습니다. 이런 관점차이가 있었기에 북부로 도망쳐온 사람들은 영원히 노예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이는 남부와 북부 갈등의 큰 원인이었습니다.
(1856년 미국 지도. 검은색은 노예제를 찬성하던 남부, 빨간색은 반대하던 북부, 가운데 아무 색도 칠해지지 않은 곳이 바로 인디언들이 살고 있던 중립 캔자스 지역입니다)
1800년대 중반, 미국 동부와 서부를 잇는 철도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남부와 북부는 서부 지역을 선점하기 위해 캔자스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피 흘리는 캔자스'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결국 1861년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여담으로 이 시기는 캔자스 지역의 인디언 원주민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하던 때이자 세계적인 부자로 손꼽히는 카네기가 철도를 팔아 부자가 된 바로 그 시기이기도 합니다.)
해리엇은 메릴랜드 주에서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정확한 생일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 역사가가 여러 증거와 함께 주장한 1822년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3살 때 그녀는 쫓기는 한 노예를 보았습니다. 뒤에서 달리던 주인은 그에게 근처에 있던 뭔가를 던졌는데 하필이면 해리엇이 그걸 맞고 말았습니다. 해리엇은 이마뼈가 함몰돼 많은 피를 흘리며 기절했고 이틀 동안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다행히 다시 깨어났지만 후유증으로 죽을 때까지 수면 발작을 앓았습니다.
해리엇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남자와 결혼하였습니다. 결혼 후에도 그녀의 신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남편은 노예가 아닌데도 그녀의 자녀들은 '엄마가 노예면 자식도 노예'라는 원칙에 따라 태어나자마자 노예가 되어야 했습니다. 해리엇은 자식마저 노예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북부로 도망칠 계획을 세웁니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그녀에게 1849년 어느날 드디어 절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주인이 사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같이 도망치기는커녕 주인의 부인이 해리엇을 팔아넘기려 하는데도 도망치지 말라고 그녀를 설득했습니다. 결국 해리엇은 '지하 철도'라는 조직의 도움을 받아 홀로 도망치는 데 성공합니다.
주 경계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두 손을 펼쳐 자유의 몸이 된 내가 예전과 똑같은 나인지 살펴보았어요.
해리엇 터브먼 <우리가 꿈꾸는 자유> 중
'지하 철도'(Underground Railroad)는 노예들의 탈출을 돕는 비밀 조직으로 '역'은 조력자의 집, '차장'은 무리의 리더를 뜻합니다. 후에 해리엇은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무려 300명을 탈출시킨 최고의 차장이 됩니다.
1850년, 미국 전역에 '도망노예법'이 실시됩니다. 노예 제도가 불법인 주에서도 탈출한 노예를 마음대로 붙잡아 다시 돌려보낼 수 있는 법으로 이렇게 다시 붙잡힌 노예는 주인의 앙갚음으로 탈출하기 전보다 더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낼 게 뻔했습니다.
해리엇은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고향에 남은 가족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자신의 자녀와 조카가 다른 지역으로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노예 사냥꾼의 눈을 피해 고향으로 되돌아와 자녀와 조카를 무사히 구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후 다시 한 번 남은 가족 모두를 탈출시키면서 어느새 세 번이나 140km를 왕복하면서도 노예 사냥꾼에게 잡히지 않은 그녀는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한편 해리엇이 가족을 모두 탈출시키는 사이 그녀의 남편은 재혼을 해 완전 남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남부에서 북부로 도망친 노예들은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 캐나다로 이주해야만 했습니다. 해리엇은 전국에 깔린 노예 사냥꾼을 피해 약 300명의 노예를 캐나다로 탈출시켰고 몇 년 뒤 벌어진 남북전쟁 때에는 700명의 노예를 구출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많은 노예를 자유로 이끈 해리엇은 '검은 모세'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흑인, 백인 피부색을 따지지 않고 모든 여성의 선거권을 주장하는데 앞장서 최초의 인권활동가라는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약 1,000명의 노예를 해방시키고 요리사, 간호사, 정찰병 등 다양한 역할로 북군의 승리에 기여한 해리엇 터브먼을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딴 많은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1978년에는 해리엇을 기리는 우표가 발행되었는데 이는 흑인을 기리는 첫 우표입니다. 2002년에는 "100명의 위대한 미국 흑인들"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고 2016년부터는 20달러 지폐의 새 인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평생을 노예로 자랐지만 해리엇 터브먼은 신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유를 찾아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다른 이들이 자유를 찾는 것을 돕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나중에는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데에도 헌신하였습니다. 그녀의 용기를 보며 '나는 내 자유와 권리를 찾기 위해 얼마큼 용기 낼 수 있는가?' 돌아보게 됩니다.
해리엇 터브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께 영화 <해리엇>을 추천드립니다. 넷플릭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