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전(錢)

by 오레오

1.

범국가적 차원에서 시행한 언어규제 정책에 따라 단어와 문장에도 값이 매겨지게 되었다. 국제정부는 언어의 영향력을 망각한 현대인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밝혔고, 여러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되었다. 한편 언어는 매매가 가능하기도 했으며,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일수록 값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뛰어올랐다.


2.

가장 먼저 힘들다란 말이 동나버렸다. 동네 마트, 슈퍼마켓, 인터넷 쇼핑몰 어딜 가도 '힘들다'란 말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간혹 부호들의 손에서 비싼 가격에 거래된단 후문만이 남았을 뿐, 세상에서 '힘들다'란 말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곤 '짜증난다'란 말이 동나버렸다. 곧이어 '부정적인 감정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사라졌으며, 시발, 개새끼 등의 '욕설'들도 뒤이어 차례차례 흔적을 감추기 시작했다.


3.

(몇 년 후) 사람들의 일상엔 제법 많은 변화가 생겼다.

3년째 사귀고 있는 한 커플은 한 달만에 집 앞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지난 달 불법 유흥업소에서 거나하게 취한 채 걸어나오는 B를 퇴근길에 마주쳤을 때, "오늘은 웬일로 말도 없이 음주가무를 거하게 즐겼구나."라고밖에 말하지 못한 A는 후회가 막심한 터였다.

월급이 통장에 들어온 어제 큰맘 먹고 '이별의 언어세트' (꺼져, 쓰레기, 헤어져 3종 구성, 일회용, 5,000,000원)를 구매한 후, 오늘 드디어 헤어졌다. A는 한 달째 아무 말도 못한 채 참아온 지금, 당장 헤어지지 못한다면 홧병이 나 죽을 수도 있었으므로 '꺼져'와 '쓰레기'와 '헤어져'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한편 B는 '니가'와 '뭘'과 '알아'를 조합하여 반박하고자 했다. 그러나 '니가('네가'에 비해 3배 정도 비싸다.)'와 '뭘'과 '알아'는 각 십 만원 언저리도 되지 않지만, 합쳐서 사용할 땐 '혐오 표현형 문장'으로 자주 사용되는 탓에 값이 10배도 넘게 뛰었으므로 사용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아무 주장도, 변명도 하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다.


4.

(다시 몇 십 년 후) 드디어 세상엔 모든 언어가 멸종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전의 '언어체계'가 사라졌다. 지난 몇 십년 간 사람들은 모국어를 잃은 후 다른 의사소통 방식을 찾기 시작했으나, 기존에 사용하던 바디랭귀지나 수화같은 것들 또한 엄밀히 말하자면 '언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값이 매겨졌고, 매매되었고, 값이 올랐고,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위층에선 암암리에 언어가 대물림되었으나, 대대적인 수사에 의해 발각된 후로 '언어세'가 생기게 되면서 문맹의 확산은 계층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5.

(그리고 몇 십 년 후) 언어에서 파생된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렸다. 언어라는 그릇에 담겨 공유되던 모든 생각의 결과물이 희미해졌다. 미술품 수집, 음악 감상 등의 고상한 취미들은 마침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씨발'보다 값어치 없는 것들로 전락했다. 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는 갈래의 미술품과 음악, 이를테면 클래식의 경우 여전히 어느정도 값이 나가지만, '죽고싶다'의 최근 경매가보다 낮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6.

(마침내 몇 십 년 후) 이 정책을 고안해낸 최초의 어느 누군가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된 흐름 탓에 후회 중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정책 시행 초기, 비밀리에 사모은 언어들을 모두 복사, 보관해둔 덕에 정돈되고 조리있는 그 옛날 선조의 역사와 영광 가득한 언어로 스크립트를 작성할 수 있었다고 발표했다-이정도로 긴 글은 근 세기에 들어 최초였을 것이다-그리고 마침내 정책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7.

한편 인터뷰를 시청하던 사람들은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특히 '철회'라는 단어는 도통 무슨 뜻인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문맹이 만든 방송국에서 문맹이 만든 인터뷰 영상을 통해 문맹이 시청하는 전세계로 송출된 그의 인터뷰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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