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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가닉씨 Aug 15. 2017

고명과 면발 사이

장렬한 희생



"나는 김치찌개에 든 돼지고기는

안 먹어요."

"왜요?"

"육수 뺀다고 맛이며 육즙이며 다 빠졌을 거잖아. 텅텅 빈 맛이랄까."


보글보글 끓는 중인 양푼 김치찌개를 보고 있노라면 가끔 그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지금은 먹지 않지만, 돼지와 소고기를 좋아했던 한때 나는 고명으로 들어간 고기를 건져 먹느라 접시에 고개를 처박을 뻔한 적도 있다.

하여간 그녀의 말이 놀라웠다. 오동통하고 기름기 쫙 빠진, 담백하지만 간이 적당히 벤 이 고기를! 안 먹는다니! 무려 양푼 김치찌개에 든 그것을.


그 말이 평소 그녀의 성격과 묘하게 겹쳐진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대기업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그녀(정확히 상사)는 소위 실속 없는 일, 그러니까 '들인 품에 비해 아웃풋이 덜 해 보이는 일'에는 쉽게 손을 뗐다. 사실 그것이 모두의 눈엣 가시일 법도 한 것이, 당시 그 회사는 막 시작하는 스타트업이었기 때문에 똥인지 된장인지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풋 대비 아웃풋의 개념 등 그녀를 상사로 맞이하면서 배운 점도 많았지만, 사실 내가 (당시) 회사에서 가치가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을 얻은 건 덤이었다. 단둘이 외근을 나가면 항상 누군가를 평가하기 바빴던 그녀는 '그 애는 이렇고 저 애는 저런데 그래서 이게 문제다, 왜? 성과가 없거든.'이라는 일정한 의식의 흐름을 보였다. 꽤나 한결같은 사람이다. 이상하게 그녀 눈에는 스타트업의 모든 것이 문제 투성이었나보다.

그게 벌써 5년 전이니까 나도 이 바닥(?)에서는 쌩 신입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혹시 우회적으로 내게 그러지 말라고 하는 건가 싶은 생각에 꽤 큰 자괴감에 휩싸이기도 했던 것이다.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를 떠올리면 고작 저 세 마디 대화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나라는 인간도 나름 사람 됨됨이를 한 번에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여러모로 그녀가 내게 좋은 느낌의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뭐랄까, 마치 그 세 마디 대화가,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는 사람(장렬히 전사한 고명)따위엔 눈길을 주지(먹지) 않아. 맛이(쓸모) 없거든."

이렇게 기억된다고 하면 비약인 건가.



에이, 옛날 생각은 그만.
장렬히 전사한 고명이 잔치를 벌인다는 잔치국수나 먹어볼까.


비가 부슬부슬 오는 창 밖에서 얇은 국수 가락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헛것을 봤습니다. 국수 가락을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은 다 아시다시피 두 가지입니다. 매콤하게 비비적거리느냐, 따땃허게 말아먹느냐.

오늘은 따땃하게 말아먹기로 결정.




넘편은 없는 관계로 일 인분만 준비합니다.


집에 있는 온갖 채소(말린 표고, 대파, 양파밖에 없어서 요것만 넣었습니다)와 국물용 멸치, 그리고 다시마를 넣고 육수를 뽑습니다.

요새 널리고 널린 제철 애호박을 채 썰어 살짝 볶고, 달걀은 풀어서 지집니다.

끓는 물에 우리밀로 만든 국수가락을 넣어 2~3분만 더 끓여줍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다른 것들도 살리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너무 흐물거려서 이 정도 국물을 내주었으면 고맙다 싶어 과감히 포기하고, 나머지 잔뜩 불어버린 표고와 다시마를 건져 얇게 썰어줍니다. 비록 그 한 몸 불 쌀라 육수를 내느라 맛이 밍밍하지만 오돌오돌 씹히는 질감이 예술입니다. 근사한 고명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죠.


나중엔 무엇이 주인공인지 국수가락과 견줄 정도로 훌륭한 고명이 됩니다.



얇고 보드라운 국수가락과 오돌오돌 씹히는 갖가지 고명의 조화는 참 예술입니다.

사실 새로이 준비한 애호박과 달걀지단만이 고명 역할을 해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얇게 썬 다시마와 표고의 역할이 상당했습니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묵묵히 자기의 역할을 다 해준다는 느낌이랄까요.

결국 하나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습니다.


오늘도 참 맛있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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