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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가닉씨 Aug 30. 2017

여름 채소를 보내며

한여름 담은 한 그릇 이야기

가지, 토마토, 애호박,

풋고추, 감자, 양배추 ….


6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마다

우리 집에는 농산물이 담긴 상자가 온다.

큰 변화가 없는 듯 하지만 이렇게 날이 갑자기 선선해지면 새롭게 합류(?)한 채소를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으으, 풋고추 아직이여? 늠 많은 거 같어.”


넘편의 입이 삐죽인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6주 연속으로 우리 집 밥상과 도시락에는 가지와 애호박, 풋고추가 빠지지 않고 올랐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인기 있는 아이돌 가수여도 음악 프로그램에서 6주 연속 1위하는 것도 쉽지 않을진대, 거참.


전북 장수군 백화골에서 농사짓는 부부가 정성스레 보내는 꾸러미

이게 뭐라고, 사실 원망이라는 감정까지 생겼다. 같은 채소로도 매번 다른 음식을 해낼 능력이 없을 뿐더러 외식이 잦은 2인가구라 매번 넘쳐나는 채소가 버겁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다양한 채소를 먹고 싶을 때, 편리하게 먹겠다고 큰 맘먹고 신청한 건데 말이다.

어느 날은 꾸러미를 아예 엄마네로 보낸 적도 있었다. 냉장고 채소 칸이 꽉 차서 도저히 더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집을 비우거나, 퇴근 후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더 난감해진다. 저렇게 두면 썩을 텐데, 이제 곧 또 다른 꾸러미가 올 텐데 하고 말이다.


어젯밤도 마찬가지였다.

퇴근 후에 너무 귀찮아서 그냥 침대에 누우려던 차에, 열어둔 창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바람과 쾌청한 하늘 때문에 ‘가을이 온다’다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진짜 가을이 온 건가 싶었다.


그러다 문득 냉장고에 든 가지가 생각났다. 여름 끝자락이라 앞으로 얼마간 보기 어려울 텐데..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여름 채소를 보내며
한여름 담은 한 그릇

냉장고에 있는 어떤 채소도 다 좋습니다.

가지, 감자, 갓끈동부, 썬드라이 토마토(혹은 생토마토), 바질 페스토, 숏파스타모둠을 준비합니다.

감자는 취향껏 썰어(전 슬라이스 했어요) 물에 담가 두고, 가지는 어슷하게, 갓끈동부는 뚝뚝 끊어 썰어줍니다.

팬에 들기름이나 올리브유를 조금만 두르고 손질한 감자, 가지, 갓끈동부를 따로 볶아 익혀줍니다.

파스타는 끓는 물에 익히고 찬물에 씻어둡니다.

조리된 재료를 한데 모아 바질 페스토와 섞으면 완성(소금, 후추를 추가해 간을 해도 좋아요)



올해 여름에 정말 징하게 먹은 가지입니다. 덕분에 가장 맛있게, 그리고 쉽게 먹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반 가른 가지를 팬에 올려 들기름을 살짝, 하얀 가지 속살 위에 양념간장(깨, 양파, 고춧가루 등이 든)을 끼얹고 5분만 기다리면 정말 맛있는 가지지짐이를 맛볼 수 있습니다.


올해 내 속 깨나 썩인 감자. 우리가 감자를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생각보다 해먹기 애매하더라고요. 밥할 때 넣어서, 얇게 채 썰어서 볶아 밑반찬으로도 먹을만 한데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가 쉽지 않은 채소였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발견한 방법은 (최대한)얇게 썰어 소금 후추 뿌려 살짝 구워 먹는 것이에요. 감자칩을 좋아하는 제게 빅맛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아요. 사실 다 먹지 못하고 아직까지 서늘한 곳에 보관 중입니다. 생각날 때마다 포슬포슬하게 쪄 먹어야겠어요.


갓끈동부는요. 꾸러미에 있던 건 아니고 한살림 매장에서 보고 채소 이름이 특이해서 호기심에 구입했습니다.(아직도 재미난 이름의 의미를 못찾았어요) 껍질째 먹는 콩류로 그린빈과 아스파라거스 중간 정도의 맛과 식감입니다. 스테이크 가니쉬로도 좋을 것 같고, 콜드 파스타나 샐러드에 넣어 먹어도 맛있어요. 그것도 귀찮다면 소금, 후추, 기름 살짝 둘러서 볶기만 해도 좋아요. 살짝 풋내가 납니다만.


썬드라이토마토는 방울토마토가 넘쳐나는 작년 이맘 때 얻은 것이에요. 주변에 솜씨 좋은 분이 직접 방울토마토를 손질하고 말려서 올리브유에 재워놓은 것이죠. 시중에서 쉽게 살 수 있지만, 토마토가 넘쳐날 때 직접 만들어두면 두고두고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서 좋아요. 그리고 방울토마토를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죠. 토마토향이 벤 남은 오일은 다른 요리에 활용할 수 있어요.

이렇게 넘칠 때는 말리고, 재워서 쟁여두는 방법이 최고인 것 같아요.


바질 페스토는 자랑 좀 해보려고요. 지난 6월인가, 꾸러미 상자를 열었는데 바질향이 확 나더라고요. 어마한 양의 바질 잎에 당황하지 않고 의연히(?) 페스토를 만들었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깻잎도 페스토로 만들어 먹으면 맛있어요. 이거 말고도 향이 강한 이파리가 넘쳐날 땐 페스토로 만들어 두면 만능간장 못지 않게 주방에서 쓰임이 많아요.


뒤죽박죽 섞여있는 숏파스타 모둠은 먼 곳에서 왔습니다. 지난 뉴질랜드 여행할 때 해 먹고 남은 것을 고대로 싸 가지고 왔어요. 그냥 두고 올까 했는데, 왠지 나중에 생각날 것 같아서 들고 왔습니다. 알록달록 귀여워요.




여름의 모든 것이

한 그릇에 담겼습니다.


바질페스토채소범벅콜드냉파스타
뭐든 '때'가 있듯이

방울토마토와 가지, 감자와 갓끈동부까지 이 채소들은 뜨거운 여름을 견뎌내고 우리 밥상에 오른 귀한 것들입니다. 사실 채소를 보며 늘 '귀하디 귀하다'는 생각을 하고 살긴 하지만, 막상은 쉽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채소만 골라서, 적당한 때에 적당히, 편하게만 먹고 산 게 어언 삼십 년이 넘어 그런 건지.


이번 꾸러미를 받아보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편하게 잘 먹고 살아왔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우리에게도 먹고 자고 싸고 싶은 '제때'가 있듯, 채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열매를 맺고 영그는 시기가 다르니까요. 가장 맛있는 때에 알아서 영글어주니 이보다 고마운 것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뭐든 '제철'에 먹는 게 가장 맛있다고 하나 봅니다.


그런데 마트에 가면 이 '제철'의 경계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추운 한겨울에 비닐을 씌우고, 연료를 떼서 열을 내주면 하우스 안은 감쪽같이 여름이 됩니다. 이를 '가온 재배'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365일 언제든 참외나 오이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죠. 비닐하우스야 그렇다 쳐도 한겨울에 한여름 흉내를 내는 건 이치에 맞지 않을뿐더러 어째 가뜩이나 막 쓰는 에너지, 더 헤퍼지는 느낌입니다. 생산자도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시장 가격도 저렴할 리 없죠.



저장의 지혜

그렇다면 이런 획기적인 방법이 발달하기 전에는 어땠을까요. 그 옛날 옛적(?)에는 채소가 넘쳐나는 여름에 말리고 절여 쟁여놓고 있다가, 먹을 것이 부족한 한겨울이 되면 꺼내 먹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장아찌나 피클, 말린 채소가 되겠네요. 김치나 과일청 같은 발효음식도 마찬가지고요. 동서양 할 것 없이 예로부터 전해온 오랜 지혜인 것 같아요.


여차저차 좀 뜨악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먹고사는 게 제일 속 편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한 식탐하는 저인 것을, 과연 '주는 대로'만 먹고 살 수 있을까요. 어렵지만 노력해보려고요.

계절이 바뀌고 있는데, 과연 다음 꾸러미에는 어떤 채소가 담겨있을까요. 툴툴대지 않고 고마운 마음으로 잘 먹겠습니다.





앞으로 두 달간 꾸러미 상자가 또 올 예정인데요. 눈물겨운 고군분투 꾸러미 정복기를 미친듯이 올리겠죠...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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