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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가닉씨 Sep 10. 2022

 아무튼, 퇴사

고용하지도, 고용되지도 않는 삶을 살기로 했다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첫 번째 직장에 다닐 때는 그저 야근 없는 회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타트업인 두 번째 직장에서는 나를 끌어줄 선배와 체계가 있으면 그만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마지막 직장은 적당히 만족스러웠고, 적당히 불만스러웠다. 돈을 더 많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긴 해도 워라벨을 즐길 수 있는 이 상황에 변화를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칠 년이라는 시간 중에 초반 이삼 년을 제외하고는 꽤 평온하게 지냈다. 가끔은 내 능력에 비해 꽤 많은 걸 누린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근 몇 년 동안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저마다 한 장씩 품고 다닌다는 사직서도 나와는 먼 이야기였다. 이런저런 일도 얼추 적응이 됐겠다, 일의 경중 완급도 조절되겠다, 그 흔한 괴롭히는 직장상사도 없던 나의 사무실 책상은 평온 그 자체였다. 조직에 대한 불만이 있긴 했는데 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 떼고 퇴근 후의 삶을 즐기면 됐다. 매일 아침 출근해서 오후에 퇴근하면 그만이었다. 하루를 꾸역꾸역 채우기 위해 바둥거리지 않았다. 여유가 있는 날은 무언가를 배우면서 호기심을 채워갔다. 그렇게 꼭 품고 싶었던 나의 첫 책 <식탁의 위로>를 썼고, 번듯하진 않아도 이력서 경력란엔 기재할 거리도 제법 생겼다.


  그 사이 오돌토돌한 나의 사고는 편평해졌다. 나에겐 분명 크고 작은 돌기가 있었는데(스스로는 ‘개성’이라 칭했다), 십 년이 넘는 조직 생활을 거치면서 매끄럽게 다듬어졌다. 아주 작은 돌기여도 드러내면 사람들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니 없애는 편을 선택한 것이다. 누군가의 돌기가 불편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반질한 대리석까지는 아니더라도 ‘슬기로운 사회생활’이라는 명목으로 제법 편평해졌다. 알록달록했던 옷장은 어느새 검정이나 하양, 이따금 회색 정도로 지하철 무리에서 조차 튀지 않는 무난한 색상의 옷으로 채워졌다. 남들 눈에 띄기 좋아하던 나는 누구보다 긁어 부스럼을 의식했고, 예전처럼 매일 일기를 쓰고 싶었지만 딱히 쓸만한 일이 없어서 펜을 내려놓기도 했다.

  워낙 평온해서 혼란스러울 틈이 없었다. 통상 퇴사라는 결정, 그러니까 안정적인 무언가를 자력으로 던져버리는 행위는 지극히 감정적이고, 버티는 결정, 그러니까 안정적인 무언가를 끝까지 잡고 있는 행위는 이성적 판단이라고, 나도 사회도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암묵적인 룰 따위는 고상한 변명거리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급 없이   있어?

아니. 대답은 한결같았다. 간단한  같아도 듣는 순간 이토록 아찔해지는 물음도 없다. 물론 지금의 쓰임새를 줄이고 아낀다면 가능하겠지만 나는  놀고 돈을 쓰고 싶었다. 쥐꼬리이긴 해도 월급은  삶의 동아줄과 같아서 나도 모르게 절실하지 않은 직장 생활이  절실해졌다. 뾰족해진 비활성화 상태의 권태는  날카롭게 일상을 파고들었다. 평온하고  불안했다. 불안하면서 평온했다. 사실  이유를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조직 안에서의 나는 언제든 대체될  있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마치 체스판의 말처럼 타인에 의해 명분이 사라졌다가  생기면서 체면 없이 이리저리 놓이기도 했다. 그래서  딴엔 한동안 업무 스킬 향상을 위해  골몰하기도 했고, 조직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목소리를 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와 조직에게 의도치 않은 생채기만 생길 뿐이었다. 누군가는 대체되지 못할 정도로 갈고닦아 반짝이면 되지 않느냐 했지만, 불분명한 사실로 얽힌 조직 생활의 룰을 깨는 것은 개인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적어도  경험으론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겐 그만한 열정도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직장인 중 자기 상황에 만족하고 매사 열정적인 경우가 얼마나 많겠냐마는 그렇다고 해서 내 삶 전체가 그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냥 현재의 소소한 행복과 평온한 노후를 위해 이러고 사는 게 보편적인 방식인걸 무슨 수로 거스를 거냐고, 오랫동안 스스로 어르고 달랬다. 어쩌다 참을 수 없는 날엔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직 정도였고 그마저 하루 이틀이면 시큰둥해져서 권태보다 단념의 속도가 빨랐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생각의 시작과 끝이 딱 붙어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끝이 어딘지 모를 모서리조차 없는 동그란 방에 갇혀버린 느낌이었다. 오도 가도 못하던 나는 방에서 구르기만 할 뿐 그렇게 점점 더 편평해졌다. 어쩌다 한 번은 이 방에 절로 빛줄기가 들어 그저 이 희망이 무의미하지 않길 바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리 만무했다. 방문을 여는 키는 스스로를 가둔 나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기술'에 대한 열망이 싹튼 것도 이 즈음이었다. 대체될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마 이쯤이지 싶다. 편평하게 고른 나의 표면을 다시 거칠게 되돌려 놓고 싶은 것도 이때였다. 무채색으로 채워진 옷장을 다시 예전처럼 알록달록하게 채우고 저 멀리서도 튀는 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싶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날카롭고 매끈한 나만의 칼을 쥐고 싶었다. 출근하기 싫거나 출근길이 힘들어서, 반복적인 일상이 지루해서, 상사가 괴롭혀서 쓰는 사직서는 분명 아니었다.


  그날 오후 사무실 한 편의 내 책상은 역시 요동 없이 평온했다. 정리벽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서 여기저기 널브러진 펜과 각을 맞추지 못한 이면지 몇 장이 여전히 굴러다녔다. 단단한 결제 파일을 들고 단계별로 몇 명을 만났고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도 서너 번쯤 들은 것 같다. 그리고 그다음 날엔가, 다음 주이던가, 여하간 내 후임이 정해졌다는 소식 말고는 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내 메신저엔 무슨 일이냐는 메시지도 몇 통 와있었다. 인수인계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겨우 마침표를 찍은 인수인계서가 한 장 한 장 뽑혀 나왔다. 페이지가 꽤 많다고 생각했는데 복사기엔 금세 출력 완료 메시지가 떴다. 십 년 동안 해왔던 일이 일 분도 안되어 정리되었다. 뜨끈했던 a4용지도 금방 식어버렸다. 책상에 돌아와 각을 맞추어 스테이플러를 찍는 순간, 별안간 다시는 누군가에게 고용되지도, 누군가를 고용하지도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아주 단단히. 살면서 고작 두어 번 겪은 일일 뿐인데도 이 상황이 진절머리가 났다. 사무실을 돌며 으레 하는 인사만 하면 이제 정말 끝이었다. 활짝 웃어야 할까 아쉬운 마음을 담아 반쯤만 웃어 보일까 별 것 아닌 걸로 고민하는 이 상황이 우습기만 했다. 근데 이게 별것 아닌 건 맞는 건가.


  다됐고 아무튼, 나는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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