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명함이에요?”
달라던 명함을 손님에게 건네면 대부분 반응이 이렇다. 당황도 잠시 킥킥 웃는 손님도 있고 덤덤히 한 장 챙겨가는 분도 있다. 가게를 열고 명함을 처음 ‘찍을’ 때만 해도 얼마나 가져가랴 싶어 기껏해야 스무 장 정도 찍어냈던 것 같다. 다시 명함을 찍기 시작한 건 이틀 뒤였다.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나의 명함은 다양한 지갑을 누볐다.
내 명함의 종류는 다양했다. 가장 많이 쓰인 명함 종이는 단연코 ‘일수 용지’였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숫자를 담은 메모지가 삼일에 한 번 꼴로 가게 문 사이를 파고들었다. 빵을 담는 커다란 종이봉투도 내 명함이 되곤 한다. 이면지에도 찍고 새로 산 책 앞 장에도 메시지 대신 나를 찍어보았다(나는 책을 사면 날짜와 간단한 메시지를 적는다).
내 명함이다. 이렇다 보니 손이 닿는 곳곳에 ‘느릿느릿 빵을 굽는 인간’이라고 쓰여있다. 심지어 작업대 앞에도 붙어있어 나는 꼼짝없이 그런 인간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나는 어느 부서, 어느 팀의 대리나 실무자가 아니었다. 명함엔 개인 정보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빵을 위한 메시지와 정보만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종종 ‘사장’이라는 말도 듣게 됐다. 어떨 때는 ‘언니’로, 또 어떨 때는 그냥 ‘주인’으로 불린다. 카운터 한편에 있을 법한 내 이름 석자는 어디에도 없다.
한때는 내 이름 석 자와 번듯한 로고가 찍힌 명함을 선망한 적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친구들과 명함을 주고받는 것은 중요한 행사였다. 주지는 못하고 받기만 하는 날이면 우울해하기도 했다. 밝은 조명 아래에 유독 반짝이는 펄감에 뭔 놈의 명함이 이토록 촌스러울 수 있을까 싶은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두껍고 반듯한 내 명함을 꺼내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했다. 드물기는 했다만 무례한 상대에게 내 정보를 내어주고 싶지 않은 적도 있었고, 회사 로고보다 작은 내 이름에 구구절절 주석을 달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때 내보이고 싶고 보이기 싫어했던 것이 과연, 단지 나의 이름과 전화번호였을까.
명함 리필…ing
승진을 하거나 인사이동이 될 때마다 두 ‘통’씩 새겨지는 명함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을 뱉은 기억이 있다. 다 쓰이기도 전에 새로운 명함을 팔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러다 막상 팀과 부서명이 바뀌었는데도 한 달째 그대로인 명함을 보면서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이름 석 자가 바뀌진 않았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던 것 같다. 옛 명함과 새 명함이 뒤얽힌 서랍 속을 보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정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직장인이 아닌 다른 형태의 노동자가 된다면, 절대 명함은 만들지 않기로 다짐한 것도 그때였을지 모르겠다.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만.
애초에 그간 살아온 행적이, 그게 설사 어느 한 조직에 담긴 작은 것이든 간에 이 명함 한 장에 다 담길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서른 후반이 된 나의 명함은 얇디얇은 메모지에 찍힌 도장이 되어버렸다. 이름이 담겨있지 않으니 엄밀히 명함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명함을 요청하는 손님께 내어 드릴 수 있을 것이 이뿐이다. 사실 내 이름 석 자 대신 나라는 인간이 하는 일을 훌륭히 나타내니 명함 이상의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이면지를 활용하니 일석이조 아닌가!
어쩌면 진짜 내 명함은 ‘빵’일 지도 모르겠다
서른 후반, 내 또래 대부분은 별 탈없이 직장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면 약 십 년 정도 명함을 지갑 속에 넣어두고 다니고 있을 테다. 물론 저마다의 이유로 장기적으로든 일시적으로든 지금의 나처럼 명함을 가지지 않은 자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별 것 아닌 척 무던한 척 해도 ‘번듯한 명함’이 없으면 이대로 굶어 죽을 수도 있다고 여긴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명함은 곧 내가 아니면 안 되는 나였고, 그 끝을 몰라야 하는 동아줄이어야만 했던 그때는 말이다.
명함으로부터 멀어진 삶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심심한 깨달음은 더 이상 심심하지 않다. 우리의 명함이 반드시 네모 반듯할 필요는 없다는 뻔한 말도 그렇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