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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가닉씨 Nov 09. 2021

내 명함은 일수 용지

“이게 명함이에요?”



  “이게 명함이에요?”

  달라던 명함을 손님에게 건네면 대부분 반응이 이렇다. 당황도 잠시 킥킥 웃는 손님도 있고 덤덤히 한 장 챙겨가는 분도 있다. 가게를 열고 명함을 처음 ‘찍을’ 때만 해도 얼마나 가져가랴 싶어 기껏해야 스무 장 정도 찍어냈던 것 같다. 다시 명함을 찍기 시작한 건 이틀 뒤였다.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나의 명함은 다양한 지갑을 누볐다.


  내 명함의 종류는 다양했다. 가장 많이 쓰인 명함 종이는 단연코 ‘일수 용지’였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숫자를 담은 메모지가 삼일에 한 번 꼴로 가게 문 사이를 파고들었다. 빵을 담는 커다란 종이봉투도 내 명함이 되곤 한다. 이면지에도 찍고 새로 산 책 앞 장에도 메시지 대신 나를 찍어보았다(나는 책을 사면 날짜와 간단한 메시지를 적는다).



내 명함이다.

  이렇다 보니 손이 닿는 곳곳에 ‘느릿느릿 빵을 굽는 인간’이라고 쓰여있다. 심지어 작업대 앞에도 붙어있어 나는 꼼짝없이 그런 인간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나는 어느 부서, 어느 팀의 대리나 실무자가 아니었다. 명함엔 개인 정보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빵을 위한 메시지와 정보만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종종 ‘사장’이라는 말도 듣게 됐다. 어떨 때는 ‘언니’로, 또 어떨 때는 그냥 ‘주인’으로 불린다. 카운터 한편에 있을 법한 내 이름 석자는 어디에도 없다.


   한때는  이름  자와 번듯한 로고가 찍힌 명함을 선망한 적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친구들과 명함을 주고받는 것은 중요한 행사였다. 주지는 못하고 받기만 하는 날이면 우울해하기도 했다. 밝은 조명 아래에 유독 반짝이는 펄감에  놈의 명함이 이토록 촌스러울  있을까 은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두껍고 반듯한  명함을 꺼내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했다. 드물기는 했다만 무례한 상대에게  정보를 내어주고 싶지 않은 적도 있었고, 회사 로고보다 작은  이름에 구구절절 주석을 달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때 내보이고 싶고 보이기 싫어했던 것이 과연, 단지 나의 이름과 전화번호였을까.


명함 리필…ing


   승진을 하거나 인사이동이 될 때마다 두 ‘통’씩 새겨지는 명함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을 뱉은 기억이 있다. 다 쓰이기도 전에 새로운 명함을 팔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러다 막상 팀과 부서명이 바뀌었는데도 한 달째 그대로인 명함을 보면서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이름 석 자가 바뀌진 않았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던 것 같다. 옛 명함과 새 명함이 뒤얽힌 서랍 속을 보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정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직장인이 아닌 다른 형태의 노동자가 된다면, 절대 명함은 만들지 않기로 다짐한 것도 그때였을지 모르겠다.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만.

  애초에 그간 살아온 행적이, 그게 설사 어느 한 조직에 담긴 작은 것이든 간에 이 명함 한 장에 다 담길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서른 후반이 된 나의 명함은 얇디얇은 메모지에 찍힌 도장이 되어버렸다. 이름이 담겨있지 않으니 엄밀히 명함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명함을 요청하는 손님께 내어 드릴 수 있을 것이 이뿐이다. 사실 내 이름 석 자 대신 나라는 인간이 하는 일을 훌륭히 나타내니 명함 이상의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이면지를 활용하니 일석이조 아닌가!


어쩌면 진짜 내 명함은 ‘빵’일 지도 모르겠다


  서른 후반, 내 또래 대부분은 별 탈없이 직장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면 약 십 년 정도 명함을 지갑 속에 넣어두고 다니고 있을 테다. 물론 저마다의 이유로 장기적으로든 일시적으로든 지금의 나처럼 명함을 가지지 않은 자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별 것 아닌 척 무던한 척 해도 ‘번듯한 명함’이 없으면 이대로 굶어 죽을 수도 있다고 여긴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명함은 곧 내가 아니면 안 되는 나였고, 그 끝을 몰라야 하는 동아줄이어야만 했던 그때는 말이다.


  명함으로부터 멀어진 삶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심심한 깨달음은 더 이상 심심하지 않다. 우리의 명함이 반드시 네모 반듯할 필요는 없다는 뻔한 말도 그렇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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