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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가닉씨 Dec 22. 2021

우연은 아닐 거예요, 크리스마스엔 슈톨렌을

ep. 88 Rocksteady - Ramy Shand



  실패는 쉽게 물러서는 법이 없다. 기어이 다음을 기약하고야 만다. 기약한 다음은 기척 없어도 나긋하다. 달콤하기까지 하다.

  작년 이맘때 일이다. 가게를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파네토네를 준비하고 있었다. 파네토네는 이탈리아 밀라노 지역의 빵으로, 연말을 큰 명절로 삼는 유럽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즐기는 다양한 빵 중 하나다. 정신없이 바쁠 때였지만 가게를 열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라 특별한 빵을 굽고 싶었다. 가장 먼저 체리, 크랜베리, 살구, 무화과를 럼rum에 절여두었다. 뭐가 됐든 크리스마스 빵이라면 반드시 요긴히 쓰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나는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짬이 날 때마다 맛있는 파네토네를 위해 반죽하고 굽기를 반복했다.

  결과는 실패. 썩 나쁘지 않았지만 내 입맛엔 무언가 부족했다. 명색이 빵집인데 크리스마스엔 민망할 정도로 조용한 연말을 보냈다.


  파네토네의 실패 따윈 인정하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그런데 절여둔 건과일이 문제였다. 치열한 싸움에서 지고 난 뒤라 극도로 예민한 상태이던 나는 그 길로 모든 걸 하수구에 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니지, 그건 정말 아니지, 거친 호흡을 겨우 고쳐 다듬었다. 럼에 절여둔 건과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풍미가 진해진다고 하니 언젠가 쓰일 일이 있겠지 싶었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파네토네나 슈톨렌을 만들 때 길게는 수년 동안 절인 건과일을 사용한다니까, 아쉽지만화나지만 내년 크리스마스를 기약하며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는 손에 닿지 않고 쉽게 보이지도 않는 선반의 맨 꼭대기에 올려두었다. 벌써 일 년이 지난 일이다.


  건과일이 든 커다란 통은 일 년 동안 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폭염이 기승이던 날엔 오븐 앞에서 뻘뻘 땀을 흘리던 나를, 스스로 시험대에 오르락내리락하다 날카로워진 나를, 추운 겨울인 더뎌진 발효를 애타게 기다리는 나를 말이다. 어쩌다 눈에 띄면 실패의 쓴 기억이 떠올라 죄 없는 통을 쏘아보기도 했다. 그러다 드디어 결전의 12월을 맞은 것이다. 저것들을 어떻게든 써먹어야 한다. 복수다!


슈톨렌은 가운데부터 썰어 먹고 남은 두 덩이를 붙여 보관한다

  독일에서는 12월 초부터 크리스마스 당일까지, 매주 일요일마다 가족과 슈톨렌을 나눠먹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브뢰첸Brötchen이나 풀콘 브로트Volkorn brot 등 평소에 독일인이 즐겨먹는 담백한 빵에 비하면 슈톨렌은 혀가 녹을 정도로 달달한 편이라 한 번에 먹지 않고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번 나누어 먹는다. 얇게 썬 슈톨렌 한 조각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보통 크리스마스 당일) 마지막 조각이 남는데, 이 조각은 가장 달콤하고 절정의 풍미가 돈다.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숙성하고 촉촉해지는 슈톨렌의 특징 때문이다. 한해의 끝을 코앞에 두고 절정의 달콤함을 즐기려는 점잖은 인내였을까.

  슈톨렌 겉에 잔뜩 뿌려진 새하얀 슈가파우더는 중세 수도사가 걸친 망토 혹은 아기 예수 위에 쌓인 눈을 형상화했다는데, 이 독특한 모양만 봐도 사연 많은 특별한 빵으로 여겨진다. 반죽에 들어가는 시나몬, 카다몬, 레몬 등 향신료의 조화도 그야말로 크리스마스 맛 그 자체다. 슈톨렌 특유의 맛을 헤치지 않고, 맛을 돋우는 홍차나 와인과 함께라면 더 풍성한 크리스마스 식탁을 완성할 수 있다. 그래서 올해는 슈톨렌을 구워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몇 번의 테스트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어냈다. 토종밀인 백강밀도 원 없이 썼다. 개인적으로 너무 단 것은 부담스러워서 덜 달게, 향신료의 맛이 튀지 않도록 레시피를 다듬었다. 발효가 잘 된 반죽을 넓고 기다랗게 펴고, 동글게 굴린 마지판과 그 양쪽 끝으로 졸인 보늬밤도 올렸다. 이렇게 하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즈음이면ㅡ슈톨렌을 다 먹어갈 그즈음ㅡ달콤한 보늬밤을 맛볼 수 있을 테다. 몇 번의 주말을 반납하고 한 작업이라 체력이 바닥난 지 오래지만, 손님과 이 독특한 맛과 경험을 나눌 수만 있다면야 이까짓은 충분히 견딜만했다.


  다행히 슈톨렌을 맛본 손님들의 반응이 꽤 좋았다. 슈톨렌의 안녕을 묻는 것이 곧 손님의 안부를 묻는 것과 같았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풍미에 대한 수다도 떨었다. 이미 한 덩이를 해치우고 또 구매하는 분도 계셨고, 슈톨렌은 처음인데 성공이라며 뿌듯해하는 손님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 한 달 동안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손님과 슈톨렌 이야기를 한 것 같다. 파네토네, 팡도르와 같은 다른 크리스마스 빵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12월 한 달 동안 손님과 나는 유독 더 깊고 진한 안부를 나누었다.


특별한 빵이라 내용물은 물론 포장도 중요하다

  드디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마지막 하나 남은 슈톨렌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기분이 묘했다. 지난 일 년 동안 애를 썼던 기억이 떠올랐나 보다. 가게를 열고 지금까지 단 하루도 자책하지 않은 날이 없다. 빵의 모양이 조금만 틀어져도 스스로 어찌나 모난 말을 했는지 헤아려보니 밖으로 꺼내지 못할 정도로 거친 말뿐이었다. 반죽 덩어리를 오븐에 넣으면 이미 손을 떠난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끝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짧고 굵은 자극이 몰려왔다. 내 자신에게 이 정도까지 해야 했나 싶어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물론 빵이 맛있다는 손님의 한 마디가 큰 힘이 되었지만, 끝내 멈추지 못한 자책은 맘 속에 켜켜이 쌓여갔다. 아무래도 작년 크리스마스의 실패를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아 두었나 보다.


   어쩌면 단 몇 번의 테스트만으로 원하는 풍미를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일 년 동안 럼에 절여둔 건과일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니까 작년의 실패 덕인 것이다. 사실 실패가 어디 이뿐이랴. 주방 곳곳엔 크고 작은 실패를 메운 흔적이 역력했다. 처음엔 없던 서큘레이터와 전기히터, 이중 진열대도 적절히 자리했다. 여름엔 덥다, 겨울엔 춥다, 비좁다고 징징댈 때마다 남편이 나서 구멍을 메워준 흔적이다. 향이 좋은 커피, 꽉 찬 간식 통, 하나둘 씩 늘어난 화분 덕에 차가운 겨울인데도 가게는 따뜻하다. 실패와 자책으로 헛헛한 마음을 누군가 보듬고 있던 것이다.


  럼의 향을 빨아들인 건과일의 풍미가 진해지는 것처럼, 나도 모르는 새에 진한 위로가 가게에 스미고 있었다. 처음 반죽을 만져보고 작은 가게를 상상하던 때부터 줄곧 이 순간을 꿈꿔왔지만, 앞만 보고 달리느라 알아채지 못했다. 이 모든 건 우연이 아니다.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온 내 노력의 결실이다. 슈톨렌처럼 달콤히, 이번만큼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별안간 떠오르던 묘한 기분을 매만졌다. 큰 탈없이 지난 일 년을 버틴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하얗고 고운 습자지에 마지막 슈톨렌을 넣고 안도를 담아 봉인했다.



잘 영근 슈톨렌 한 조각 = 온 세상

  남편과 나를 위한 슈톨렌 한 덩이는 따로 남겨두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드디어 마지막 한 조각을 썰었다. 알코올 향이 달아난 건과일과 향신료가 뒤섞인 오묘한 향이 혀를 감돈다. 쿠키와 파운드케이크 사이를 오가는 식감이 재밌다. 달큰한 건과일 사이로 오독오독 씹히는 견과가 묵직하다. 지난 일 년의 찐한 풍미가 느껴진다.


  이 한 해, 그 끝에서, 부디 당신도 미치도록 환상적인 달콤함을 만끽하길 바란다. 달콤함은 우연이 아니다. 부단히 살아온 한 해, 그 자체다.




  겨울, 특히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밤이면 꼭 듣던 곡입니다. 스무 살 무렵, 밤이 되면 동네 친구랑 근처 공원에서 만났어요. 그렇게 수다를 떨어 놓고 아쉬워서 그 야밤에 친구네로 올라갔어요.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인데 그날도 어김없이 친구네에 갔죠. 음악을 참 좋아하던 그 친구가 꺼낸 CD에서 이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왜인지 눈도 펑펑 눈물도 펑펑 흘렸던 기억이 나요.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고 흘러서 그 친구는 아직도 그 집 근처에 살고 저는 그 집 근처에서 빵 가게를 하고 있어요. 종종 친구가 아이들이랑 가게에 찾아오면 아직도 그때 듣던 노래 이야기를 한답니다. Remy Shand는 캐나다 아티스트로 알려져 있는데, 최근엔 활동이 뜸한 것 같아요. 캐나다의 겨울이 깊어서일까요. 이 Rocksteady 포함, [The way I feel] 앨범 전곡이 겨울에 귤 까먹으면서 듣기 참 좋습니다. 물론 저는.. 알코올과 함께 듣는 걸 좋아해요!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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