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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가닉씨 Feb 14. 2022

엄마의 당근라페

비록 그게 볶음일 지라도




  “이게 뭐야?”

  “뭐긴. 너 맨날 먹는 그거, 당근.”

  “그래, 당근. 그러니까 당근라페 말하는 거야?”

   “뭐? 당근라떼? 러페?” 

 

  아직도 엄마는 나를 어린 애로 여기는 것이 틀림없다. 이따금 직접 만든 반찬을 내보이면 엄마의 두 눈이 휘둥그레 졌다. ‘애’가 반찬을 해오다니 엄마 눈엔 그게 얼마나 어설퍼 보였는지 피식 웃기까지 하신다. 그러다 얼마 전엔 제주 당근이 가장 맛있을 때라 하여, 당근라페를 만들어 가게에 가져갔다. 활동량이 많은 만큼(아니 실은 그 이상으로) 먹어대서 불어난 살을 빼려고 가볍게 끼니를 때울 요량이었다. 마침 내가 만든 빵과도 잘 어울렸으니 이만한 채소 반찬도 없었다. 파릇한 잎채소 위에 오른 주황의 당근. 이 추운 겨울에 푸성귀만 먹으려니 허한 데다가 비주얼도 영 심심했는데, 주황빛의 가느다란 당근채를 얹으니 한결 나아 보였다. 내가 먹는 걸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엄마는 ‘당근이야? 채도 얇게 잘 썰었네’라며 네가 어쩐 일로 그럴듯한 반찬을 해냈냐는 말씨였다.

  겨우 한 이틀 도시락을 자급했을 뿐인데 그마저 힘겨웠다. 이를 귀신같이 알아챈 엄마는 다음 날부터는 당신이 샐러드를 가져다주겠노라 했다. 엄마의 샐러드는 투박할 것이 분명했지만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다음 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엔 내 두 눈이 휘둥그레 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엄마가 당근라페를 해온 것이 아닌가!


  사실 인천에 가게를 열게 된 몇 가지 이유 중에는 엄마가 사는 도시라는 점도 있었다. 결혼해서 오랫동안 살던 인천을 떠나 남양주로 이주했고 생각보다 나는 그곳에 잘 적응했다. 친구나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 없어 외로운 것 말고는 딱히 불만이 없었다. 서울과 그리 멀지 않았고(광화문까지 출퇴근했으니) 한적한 양평이 지근거리였다. 강원도도 두어 시간이면 갈 수 있어서 쉬는 날을 다채롭게 보낼 수 있었다. 서울처럼 복잡하지 않고 집과 집 사이가 널찍해서 만족도가 꽤 높았다. 퇴사를 결정하고 가게를 알아보면서는 당연히 내가 살던 동네를 일 순위로 고려했다. 하지만 왜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던 중 엄마네에 들렀다가 우연히 예전에 살던 지금의 동네를 지나게 된 것이다. 주름이 늘어버린 내 얼굴과 마음과는 달리 모든 게 그대로인 이 동네에 나는 흠뻑 빠져버렸다. 엄마 집과 차로 15분 거리라 그런지, 왜인지 이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확신이 섰다.


  가게를 열고 두어 달쯤 지나 엄마가 합류했다. 엄마는 두어 시간 동안 새벽녘 내가 이끈 전쟁터를 정리했다. 다음 날 치를 전쟁을 준비하는 것도 엄마의 몫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주방 경험이라곤 집 밖에 없던 엄마에겐 꽤 어렵고 낯선 일이었을 것이다(나는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이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엄마가 주로 해온 일이 비교적 활동적인 마트 판매일이었으므로, 이 어두컴컴한 주방에 선 엄마는 꽤 외로웠을 것이다. 그나마 말동무라고는 딸내미뿐인데, 모든 게 서툴던 그때는 극도로 예민하던 때라 가시가 잔뜩 돋친 내게 쉬 말을 걸거나 볼멘소리는 전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의 도시락

  

  모든 것이 낯선, 나였다면 꽤 괴로웠을 그 상황에, 그래도 엄마가 유일하게 마음 놓고 웃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당신이 싸 온 도시락을 먹을 때였다. 한참이나 때를 놓치고 점심이라고 하기도 무색한 끼니를 때워야 하는 내게 엄마는, 매일같이 갓 지은 밥과 다른 종류의 반찬을 내놓았다. 여름엔 커다란 통에 시원한 냉국을, 겨울엔 따끈한 수제비를 담아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거의 매일을 보는데도 엄마의 손엔 한 달은 너끈히 먹고도 남을 양의 음식이 담긴 보따리가 들려있었다. 엄마는 당신은 때가 아니라며, 겨우 앉아 허겁지겁 식사하는 나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때만큼은 종종 늘어놓던 잔소리를 내려놓았다.


  들릴 듯 말 듯 혼잣말로 뭔가 먹고 싶다고 하면 다음날 엄마의 보따리엔 꼭 그 음식이 들려있었다. 국물보다 건더기를 좋아하는 나의 취향을 잘 아는 엄마가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는 정말 묵직했다. 국물은 그저 양파, 호박, 묵직한 두부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을 뿐, 뜨끈하고 구수한 자신의 역할은 해내지 못했다. 급기야 엄마의 보따리는 우리 집 냉장고에 까지 들어섰다. 어떻게 너만 먹냐며 남편에게도 챙겨주라는 것이었다. 거의 매일같이 반찬이 수급되니 애매하게 먹다 남은 반찬이 냉장고가 칸칸이 자리했다. 솔직히 가끔 숨이 막혔다. 나도 내 뜻대로, 내 방식대로 먹고 해 먹고 싶은 것이 있는데 냉장고를 열 때마다 빈틈없이 들어찬 통을 보면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살 안찌는 김밥은 없을까? 하는 한 마디에 등장한 엄마의 창작 요리

  

  이 때문에 엄마와 다투는 일이 잦았다. 엄마의 밥상머리에선 금기(?)나 다름없는 간에 대한 불평부터, 아직 집에 많이 있는데 또 가져다주면 어떡하냐, 보지도 않고 대뜸 뭘 또 그리 많이 가져왔나는 나의 말이 화근이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나와 팽팽히 맞서기도 했고, 때론 그냥 웃어넘겼다. 그리고는 꼭 오래된 건 버리라는 말을 덧붙였다. 대체 엄마의 반찬을 아무렇지 않게 내다 버릴 자식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하지만 손에 닿지도 않는 냉장고 저 끝에 둔 반찬은 결국 쉬어버리기 일쑤였다. 그 괴로움 덩어리를 앞에 두고 혹시나 더 두고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이리저리 살피며 한참을 서성였다. 엄마의 반찬은 한참이나 내 속을 끓이다 결국 음식물쓰레기봉투로 곤두박질쳤다.



엄마의 당근라페 아니아니 당근볶음(!)

  

  엄마가 당근라페를 알 리 없었다. 한 번도 그에 관해 말한 적도 없었고, 엄마가 물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근라페의 핵심인 홀그레인 머스터드가 엄마의 냉장고에 있을 리 없다. 그렇지만 엄마는 보란 듯이 당근라페를 만들어 주었다. 당근을 얇게 채 썰어 기름에 볶고 참깨를 뿌린, 이게 엄마표 당근라페였다.

  당근라페, 아니 당근 볶음을 받아 든 나는 말없이 웃었다. 깔깔거리니 엄마는 그렇게 그게 좋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당근은 역시 기름에 볶아야 그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어’라고 무려 두 번이나 말했다. 당근을 채 썰어 볶은 게 얼마나 맛있겠냐만은, 정말로 맛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달큰한 당근임이 틀림없다.

   그날 이후, 나는  이상 엄마 손에 들린 보따리에 토를 달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딸이 좋아하는  해먹이고 싶은 엄마 마음을 꼬박 서른여덟 해를 넘기고 나서야 겨우 알아챘기 때문이다.  오래도 걸렸다.



진짜 당근라페 만들기


  제주도의 대표적인 월동채소 중 하나인 당근. 본래는 가을 뿌리채소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따뜻한 날씨로 제주의 당근 출하량이 평년보다 15% 정도 증가했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 가장 맛있고 저렴하게 즐길 수 있어요.


제 빵과 먹을 때가 가장 맛있어요 ㅎㅎ



당근을 채 썰어 준비합니다. 되도록 슬라이서를 이용하는 게 좋아요. 최대한 얇게 썰어야 식초, 홀그레인 머스터드의 향이 잘 베니까요.

채 썰어둔 당근에 소금을 살짝 넣어 절여둡니다. 10분~15분 정도면 충분해요.

당근을 절이는 동안 홀그레인 머스터드, 올리브 오일, 레몬즙(혹은 식초도 가능), 취향에 따라 설탕을 섞어줍니다. 이런 절임 소스를 만들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이 모든 건 ‘취향’에 따릅니다. 그래서 저는 계량도 제대로 하지  않아요. 개인적으로 시큼한 맛보다 홀그레인 머스터드의 걸걸한 향을 좋아해서 잔뜩 넣었습니다. 맛있는 당근은 그 자체로 달큰해서 따로 설탕은 넣지 않았습니다.

절여둔 당근과 위의 소스를 비비적거립니다. 대부분의 음식이 그렇듯 당근라페도 최소 하루는 지나야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새를 참지 못하고 간을 핑계로 입에 넣었습니다.

술 안주로도 훌륭합니다

사실 당근라페의 진짜 매력은 다른 음식과 곁들여 먹을 때 드러납니다. 저는 빵쟁이라 주로 빵과 샐러드와 먹는 걸 선호합니다. 달큰하면서 아삭한 당근 사이로 홀그레인 머스터드가 톡 터지며 자칫 심심한 빵의 포인트가 되어주거든요.

물론, 엄마표 당근라페, 아니 당근 볶음도 당근을 맛있게 즐기는 데에 충분합니다.




  오랜만에 빵 이야기가 아닌 요리 이야기를 써봤어요. 사실 빵 이야기만 해도 쓸 것이 넘쳐나는데, 가게 일과 병행하다 보니 글 쓸 짬을 내기가 쉽지 않아요. 게다가 이제는 제 업이 되어 그런지 빵과 가게 이야기는 쉽게 써지지도 않아요. 벌써 일 년 하고도 육 개월이 지나가는데도 여전히 빵과 가게 운영이 술술 쓰이거나 읽히지 않는 모양입니다. 바쁜 요새 막상 요리할 시간은 없는데 빵과 곁들이는 다양한 소스나 음식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어요. 엄마의 반찬 보따리처럼 하나하나, 정성스레 펼쳐 보일게요!


  오늘도 부디 맛있는 하루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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