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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가닉씨 Jul 23. 2020

고등어구이를 좋아하세요...

장마철엔 고등어구이와 막걸리 한 잔을

          


    

  밖은 비가 막 갰다. 꿉꿉한 공기를 가르니 별안간 스무 살 무렵에 어른 흉내를 낸다며 즐겨먹던 고등어구이와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난다. 이십 대 초반의 J와 나는 종종 그 골목을 쏘다녔다. ‘삼치골목’이라고 잘 알려진 동인천의 거리로, 딱히 단골집이 있는 건 아니었고 줄지어 있는 가게 중에 발길이 닿는 곳을 찾는 정도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주인보다 먼저 생선 굽는 냄새가 우리를 반겼다. 운이 나쁘면 빈자리가 없어서 발걸음을 옮겨야 할 정도로 거의 모든 가게가 사람들로 붐볐다. 가게에 가득 찬 뿌연 연기를 헤집어보면 술 한 잔의 마법이 연출한 다양한 표정의 얼굴들이 보였다. 그리고 마치 그 근방 모든 가게가 짜기라도 한 듯 한쪽 벽에는 사람들이 갈겨쓴 글씨가 빼곡히 겹쳐져 있었고, 생뚱맞게 천장에 매달린 주전자는 누런 조명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고민할 것도 없이 메뉴와 가격이 적힌 주문판의 ‘고등어구이’와 ‘막걸리’ 항목에 ‘ㅡ’ 하나씩을 그었다. 왜 굳이 삼치골목에서 고등어구이를 주문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주머니가 가벼운 시절이라 익숙한 맛에 실패 확률이 낮고 비교적 값이 싼 고등어를 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막걸리는 먼저 주세요.”


  어련히 알아서 챙겨줄까 뭐가 그리 급했는지 그새를 못 참고 먼저 막걸리를 내 달라고 했다. 주인공인 고등어 구이가 등장하기에 앞서 막걸리와 함께 말라버린 고추냉이와 간장이 담긴 종지, 생양파와 초간장이 테이블에 놓였다. 어느 집은 양파를 초간장에 오랫동안 절여둔 장아찌 같은 것이 추가로 나오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개의치 않던 우리는 종지 속 고추냉이를 휘휘 저어 간장과 섞는 것으로 그날의 레이스를 준비했다. 막걸리 한 잔을 쭉 들이켜고 나면 생선 기름으로 껍질이 지글지글 끓던 고등어구이 한 접시가 등장했다.

  이때 고등어의 살과 뼈를 분리하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생선살 가운데에 있는 등뼈를 따라 젓가락을 꾹꾹 눌러준 다음, 살살 잡아당기면 등뼈와 살이 말끔하게 분리된다. 그러고 난 후에는 반드시 생선을 껍질이 보이는 쪽으로 뒤집어 놓았는데, 이렇게 하면 살보다 질긴 비늘을 먼저 자르는 격이라 살점이 쉽게 분리되어 편히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등어구이를 해체하는 작업까지 마치면 비로소 우리의 취향으로 꽉 채워진 밤을 위한 준비가 다 된 것이다.      


  삼치골목에서는 영화 이야기가 제일 먼저 등장했다. 당시 골목의 모습은 우리가 좋아하던 감독의 영화에 적어도 한 번은 등장했을 법할 정도로 꼭 닮아 있었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대화가 무르익으면 꼭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인지 어디선가 감독이 ‘평범한 우리 둘의 대화’를 주시하고 있을 것만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영화 같은 삶이 별것이냐고, 이렇게 좋아하는 이야기와 고등어를 안주 삼아 술잔을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노난 인생이라며 깔깔댔다.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막걸리 한 병이 더 늘어 있었다. J와 어렸을 때부터 즐겨 듣던 힙합 이야기도 빠질 수 없는 안주였으며, 다른 장르의 음악 그리고 책에 대해서도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술자리의 필수 안주인 연애 이야기도 했고, 이별이라는 감정 소모전을 치르다 뻥 뚫어진 마음의 빈자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면서 아픔을 떨쳐냈다.


동인천 삼치골목의 어느 생선구이집

  

  그런데 언제부턴가 취향을 늘어놓던 그 밤이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취업 걱정과 준비에 여념이 없던 때부터인 것 같다. 일단 취업에 성공하고 사회생활에 적응만 하면 다시 이전처럼 취향으로 가득한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아니었다. 어찌어찌 직장생활에 적응은 했는데 언제나 체력이 문제였다. 퇴근 후에 마시는 술 한 잔은 꿀맛이었지만, 우리에겐 내일의 업무가 있었다. 도저히 다음 날 일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그렇게 막잔을 드는 시간이 점차 빨라졌다. 첫 잔은 달게 넘겨도 저마다 다른 이유로 들어야 했던 막잔은 쓰기만 했다. 우리의 밤은 무거운 공기가 힘없이 축 처져 가라앉았고 언제부턴가 취향이 아닌 다른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과 사람에 치여 지친 상황에서 마냥 음악이나 영화 이야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버티라는 야속한 격려를 주고받으면서도, 힘든 일이나 괴롭히는 서로의 상사를 향해 실컷 욕을 퍼부어주는 온정도 잊지 않았다.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던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것조차 어려워졌고, 이마저 취소되면 다시 만나는 날까진 두어 달이 걸리기도 했다.


  그러다 얼마 전 J와 나는 정말 오랜만에 삼치골목을 찾았다. 나는 예전보다 더 능숙한 손놀림으로 고등어구이의 살과 뼈를 말끔히 발라냈다. 우리의 입맛이 변한 건지 고등어구이는 예전 그 맛이 아니었다. 골목은 한적했고 영화에 나올법할 정도로 분위기 있다던 가게는 사람이 없어서 쓸쓸해 보였다. 막걸리 대신 소주를 시킨 우리는 회사와 결혼 생활, 근황 이야기를 나누었고, 근래 최대 화두인 임신과 출산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펼쳤다. 간간이 음악 이야기와 최근에 봤던 영화에 대해, 우리가 좋아하던 감독의 스캔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얼마 전 내 맘을 헤집은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나보다 먼저 책을 읽은 그녀는 마지막 부분이 인상적이라고 했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소설의 마지막은 열몇 살이나 젊은 새 연인을 뒤로하고 오랜 연인과의 재결합을 택한 여주인공 폴의 혼잣말로 끝이 나는데, J는 이 부분에서 유독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했다. 남주인공 로제와의 재결합이 불행의 반복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상황을 바꾸거나 저항할 의지가 없는 폴의 처지에 공감해서라고 했다. 아마도 폴은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져서, 필요 이상의 감정 소모를 두려워했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때마침 서른 중반을 애매하게 넘고난 우리의 열정과 취향이 점점 무뎌지고 있음을 토로하던 때였다. 책 한 권을 읽는 데에만 엿새가 걸리고, 어디까지 읽었는지조차 쉽게 잊고 사는 무미건조한 우리의 일상을 말이다.

  사실 책의 제목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문장은 젊은 새 연인인 시몽이 여주인공 폴에게 편지로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질문을 받아 든 폴은 촌스러운 질문이다 싶다가도, 막상 그간 잊고 지내온 자신의 취향을 더듬기 시작했다. 즐겨 듣던 음악과 담을 쌓은 지도 오래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이 유치한 질문으로부터 거대한 망각 덩어리 즉, 일상생활 너머의 것을 즐기는 여유를 잊고 살아온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J와 같은 소설을 읽고 다른 소회를 주고받으니 다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찾은 삼치골목에서, 고등어구이에 막걸리를 마시고 있으니 비에 젖은 마음이 더 눅눅해졌다. 때마침 접시엔 고등어의 뼈만 남았는데 홍합탕이 서비스로 등장했다. 예전처럼 밤을 새워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다음날 각자 일정이 있어 일어날 채비를 했다. 오늘의 대미를 장식할 막잔을 따르며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에게도 그간 잊고 지낸 취향을 떠올리게 할 문장이 있을까?”

  “음, 글쎄…. 아, 생각났다!”

  “뭔데?”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가 대답을 재촉했다.


“고등어구이를 좋아하세요...?”

“푸하하하! 정말 그렇네. 하아, 시간 다됐다. 이제 진짜 막잔!”


  좀처럼 쓰기만 했던 막잔이 웬일로 그날은 달았다.






  모처럼 오랜만에 집에서 쉬는 중인데, 밖엔 부슬부슬 비가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책 작업을 하던 폴더를 정리 중이었는데 안타깝게 최종 라인업에 들지 못한(?)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마침 비가 와서 그런지 막걸리 한 잔이 땡기던 참이었거든요.언제는 뭐ㅎㅎ


  덧붙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이 덥거나 추울 때에, 혹은 위로가 필요할 때든 기쁨을 나누고 싶을 때든 따끈한 저의 책 <식탁의 위로>는 언제든 읽어도 맛있는 글이 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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