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이직 준비 하다말고 아이슬란드 티켓을 끊은 사연
나는 이직준비를 하다 말고 아이슬란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초여름에 겨울 옷을 사들이고, 평소에는 거들떠도 안보던 인스턴트 식품들도 쟁여두었다. 지금 당장은 떠날 수 없는 이유는 한가득이었다. 지금 당장 떠나야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였지만, 너무도 강력했다.
경력직은 이직하기 쉽다던데. 무조건 환승 이직해야 한다던데.
들은 말은 많고 해야 할 건 많았다. 낮에는 바뀔 듯 바뀌지 않는 업무에 고민만 늘어갔고 밤에는 했던 일들을 되짚으며 포트폴리오를 썼다. 시간은 갔는데 나는 뭘했나. 새로운 공고를 찾아보고, 무거운 마음으로 서류를 쓰고 면접을 보고 다시 일을 했다.
"진짜 아이슬란드 안 갈래요?"
독서모임을 일 년 이상 함께 해온 써니 님의 연락이었다. 오늘의 일들과 미래의 일들로 좀처럼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았던 나는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작년 가을, 독서 모임 사람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다. ‘독서 모임’. 얼마나 재미없어 보이는 단어인가.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힙한 더듬이로 최고의 카페, 맛집, 술집까지 두루 섭렵하면서도 책까지 빼놓지 않고 읽으시는 분들이 모인 취향공동체이다. 이 시간을 위해 모임 사람들은 한달에 얼마간의 시간을 내고 때로는 뒷풀이에는 못갈지언정 모두가 책을 읽고 발제자는 이야기할 내용을 고민한다. 그리고는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지지않은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생각과 감상을 넓혀간다. 이런 모임이 어느덧 12번이나 이어져왔고 그 기념으로 제주에 다녀왔다. 누구도 오래 지속될 지 몰랐던 이 모임으로 제주까지 온 것이 모두들 의아하면서도 뿌듯했다. 함께 한 열두달은 물론이고, 움직이는 차 안에서 듣는 노래가, 밤 열 두시가 넘어 계속되던 '백 년의 고독' 이야기가, 술에 취하지도 않고 새벽 4시까지 이어지던 게임이 이럴 수 있을까 정도로 즐겁고 소중했다. 그 1주년 모임에서 나온 말이, 이제 외국으로 뻗어나가 보자는 제안이었다.
일정이 확정된 분은 열 명 중 두 명뿐이었다. 모두들 관심을 가졌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하다 보니 현실적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일상은 버겁고 미래는 불투명했으니까.
두 명 중 써니 님은 특히 ‘아이슬란드’라는 나라의 매력에 푹 빠져계셨다. 국민의 반이 작가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국가. 게다가 음악을 사랑하는 이 나라 사람들. 마치 우리 같다고 했다. 함께 책을 읽고, 노래를 들으며 서로의 취향을 공유하고 확장해 나가는 취향공동체의 집약체였다. 이들과 함께하는 취향공동체에서는 '그런 노래 듣는구나' 하는 심드렁한 답변이 돌아오지도 않았고 '그게 가수 이름이야?' 하는 답변이 돌아오지도 않았다. 내가 찾던 노래들을 알 수 있었고 몰랐던 노래들을 함께 공유해가며 흥얼거릴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19년 2월, 써니 님이 다시 한번 정말 가지 않겠냐고, 연락을 주셨던 것이다. 비행기를 표를 끊을 마지막 기회였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이건 정말 엄청난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갈 수 있는 시간과 어느정도의 금전적인 여유, 함께할 사람들 말이다. 시간이 없어서 못 간 여행, 돈이 없어서 떠나지 못한 날들, 주말 약속 조차 시간을 맞추기 어려운 친구들을 생각해보니 이 세 박자는 정말 맞추기 어려운 거라는 걸 겪어서 알고 있으니까.
"저도 갈래요!"
마음을 결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과 다르게 그렇게 답장을 드린 다음날부터 뚝딱뚝딱 일정이 정해졌고 비행기 표를 샀다.
어느 주말에는 약속을 잡아서 7박의 숙소를 예약했다. 어떤 꽃 피는 봄날에는 차를 빌려 파주까지 드라이브를 가서 '여긴 아울렛이니까~'하면서 겨울 옷을 두 손 가득 사기도 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하고, 가서 하고 싶은 것들을 예약했다. 그 와중에 액티비티를 두 번 예약해서 영어에 떨고 카드값에 떨며 취소하는 메일도 보내기도 했다. 어떤 주말에는 우리의 음악 취향의 공통점을 찾아 어느 인디밴드의 공연도 다녀오고 쏘주도 한 잔 했다. 유난히 힘들었던 하루 끝에서는 '아이슬란드에서 들을 곡'이라는 플레이리스트를 서로에게 공유하며 괴로움을 덜어냈다. 일상의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아이슬란드에서의 하늘과 바람과 산을 생각하면 조금은 견딜만했다.
두려움과 함께 기대를 품으며 반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과 반쯤은 꼭 잘해봐야지 하는 마음이 공존했고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어렵게 시간과 돈을 쓰며 가는 곳, 게다가 글과 책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여행을 이렇게 보내기는 너무도 아까웠다. 글이라도 써두자. 각자의 방식으로 글을 쓰고 읽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기에 질감도 색도 모두 다른 각자의 도구로 우리는 앞으로의 일을 기록해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