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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i Jul 19. 2019

맨날 공항에서 놀고 싶어

day1. 너도 떠나보면 알게 될 거야


 기자가 되고 싶었다. 업에 가치를 뒀기보다는 그 명함이 좋았던 어린 마음에서였던 것 같다. 그다음엔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신방과 수업이 너무 재밌어서 홍보회사에 가고 싶었는데, 이내 곧 내가 얼마나 창의성이 결여된 인간인가를 처절히 느끼며 접었다. 그리곤 직감적으로 내가 바로 항공사를 들어갈 인재구나 생각했지만 -때마침의 첫 유럽여행의 여파가 남아서- 서류부터 광탈한 건 안 비밀. 지금 회사엔 운 좋게 붙어 9년을 하루 같이 다니고 있지만, 휴가를 떠날 때마다 한 가지 생각은 변함이 없다. 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 공항이구나!


 여행 맥시멀리스트에게는 짐 싸는 순간이 그리 고되지 않다. 그냥 다 넣으면 되는 거라 머릿속엔 설마 이거 23kg 안 넘겠지 하는 생각뿐이다. 괜히 맥시멀리즘이 아닌 순간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정말 위험할 뻔했다. 외식이 여의치 않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우리는 아주 몇 번의 외식만을 계획하고 식사 당번(!)까지 계산해놨기 때문에 내 물품 중 상당수가 먹거리였기 때문이다. 여행에 단 한 번도 가져가 본 적 없는 햇반부터 야무지게 사 둔 도시락통 사이로 위치한 주먹밥 후레이크까지! 여행 시작도 전에 끝났을 때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져서 당황스러웠는데, 이 와중에 짐이 도착 안 하는 경우가 다반사란 정보에 또 배낭으로 한 움큼 빼뒀구나 ^^. 이토록 짐에 치이는, 모든 게 난생처음인 여행에 자꾸 미소가 삐식삐식 샌다.


  설렌다. 여행에서 가장 설레는 구간을 꼽자면 단언컨대 공항리무진을 타는 순간부터 출국신고를 지나 면세구역에 입성하는 고 시간일 것이다. 그 순간이 너무 설레고 즐거워 3시간도 훨씬 전에 가서 만끽하고 있으니 이미 말 다함. 출발에 대한 설렘으로 쉴 새 없이 북적이는 공항 안의 매 분 매 초는 언제나 두근거린다. 어느 공간이 이 공간보다 더 밝은 에너지를 낼 수 있을까. 이 곳에 있는 모두가 나처럼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을 벗어난다는 생각에 다들 신나는 걸까. 일상의 일시정지로부터 오는 뒤틀렸던 인격의 회복, 극단적 일희일비의 감정선 안정,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나를 일으키는 도파민의 분비. 좋다. 좋아도 너무 좋다. 분노조절장애가 의심되는 나부터 이러고 있으니 공항의 기운이란, 보통 긍정의 기운이 아니다. 벌써부터 치유는 시작됐다.


 이 와중에 여행 전 날 카드 명세서를 본 게 이 기분의 유일한 오점이었다. 부동산도 중요하고, 차도 중요하고, 주식 및 펀드도 중요하지만 난 그래도 날 잠시 현재에서 건져 올려주는 여행이 우선이라, 그 방면에선 정말 잘 살아왔는데 문득 아무것도 -잔고 포함-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다. 진정하려고 해도 현실 앞에서 무너져버린 마음에 잠깐씩 착잡해지기도. 그래도 당장 이번 여행부터 현명한 소비를 해야겠다고, 티 없이 밝은 기분에 티끌 하나를 얹었다.


 그런데 역시 조상님 말은 틀린 게 하나 없다. 선구안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을 받들어 친구를 따라 선글라스를 사 버렸다. 구경만 한다는 걸 이것저것 코에 뭘 얹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2개를 사면 추가 할인이 있다는 말에 주저함이 사치처럼 느껴져 버렸고, 친구 하나, 나 하나 사이좋게 사고 쪼리까지 사은품으로 받으니 여행 맛이 달다. 속으로는 집에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로 꾸밀 수 있을 만큼의 수많은 선글라스들이 생각나고, 아이슬란드는 날씨가 대체적으로 안 좋을 텐데 몇 번이나 쓰려고 샀을까란 생각에 비행기를 후진시켜 취소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말이다.


 도착해보니 경량 패딩도, 긴 팔 히트텍도, 방수재킷도 챙기지 않았음-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것과도 같은-을 알았지만, 여긴 다 필요 없고 오직 선글라스만 있으면 되는 그런 써니한 날씨인걸! 이 여행에 대한 간절한 내 마음을 분명 어느 신이든 한 분은 갸륵하게 여겨주신 것이 분명하다. 신이여 고맙습니다. 전 선글라스가 두 개입니다. (사실, 난 맥시멀리즘이 아니었던 걸로. 그냥 여행 조증으로 아무거나 막 넣는 그런 사람이었던 걸로) 원래 하얗지 않은 피부에, 몇 년 전 스페인에서 훈장처럼 받은 기미가 늘 마음에 걸렸던지라 어떻게든 태양을 피해보려 해도 번번이 무방비 해제가 되는 게 왜 이렇게 행복하고 감사하던지.



 행복이 별건가. 항공권보다 공항 가는 길에, 선글라스보다 선글라스 쓸 수 있는 날씨에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는 걸 보니 행복을 대하는 건 자세임을 다시금 느낀다. 물론 ‘일주일에 돈 이백 써봐라, 여기가 천국이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안다. 떠나보면 너도 알게 될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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