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는 소리 없이 ‘내 자리’를 지운다
요즘 나는 이상하다.
크게 힘들지 않은데, 자꾸 꺼진다.
아무 사건도 없는데, 마음이 비어 있다.
그 비어 있음은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가장 쉬운 말로만 돌려 말한다.
“그냥… 모르겠어.”
그런데 누군가 내 상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줬다.
“가치와 현실이 어긋날 때, 사람은 공허해집니다.”
그 문장을 듣는 순간,
내가 요즘 왜 이러는지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사람 속에서 살아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돕고, 관계를 조율하고,
상황을 정리해주고,
그 사람이 “덕분이에요”라고 말할 때—
그때 나는 내가 선명해졌다.
그러니까 나는 ‘일’보다
필요함으로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쓰이는 감각,
그 감각이 내 하루를 지탱해줬다.
“나는 쓸모 있는 존재야”
그런데 지금은 그 통로가 막혀 있다.
직장에서는 “굳이 많은 일들을 벌이지 말라”는 공기가 있다.
내가 뭔가를 하려 하면
필요가 아니라 ‘과잉’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가정에서도, 공동체에서도
내가 서 있던 자리들이 예전 같지 않다.
주일에는 출근하고,
관계의 중심에서 조금씩 비켜난다.
문제는 일이 줄어든 게 아니었다.
내가 ‘필요한 사람’으로 서 있던 자리가 줄어든 것이었다.
공허는 울지 않는다.
대신 아주 생활적인 얼굴로 찾아온다.
퇴근 후,
나는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못 한다.
운동화를 꺼내놓고도 끈을 묶지 못하고,
책을 펴도 한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나는 자꾸 다른 걸 연다.
배달 앱, 넷플릭스, 쇼츠, 인스타그램
본질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비어 있다는 감각을 지우고 싶어서였다.
공허는 감정인데,
나는 그걸 자꾸 감각으로 덮어버렸다.
내가 요즘 버티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요즘 피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은 결심했다.
공허를 없애지 않겠다.
대신 공허를 읽겠다.
공허는 내 결함이 아니라
내가 중요하게 여겨온 삶이
지금 잠시 길을 잃었다는 신호일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한 줄을 적었다.
“나는 필요받지 못해서 비어 있다.”
이 문장이 부끄러운 고백이 아니라
나를 다시 살리는 출발이 되길 바란다.
내가 다시 살아나려면
더 많은 일을 벌이는 게 먼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갈망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알아차리는 일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공허는 나를 무너뜨리러 온 감정이 아니다.
내가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라고,
조용히 길을 가리키는 감정이다.
—
육상부 | 감정을 해석하는 사람의 일기
공허는 사라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이 틀어졌다는 신호다.
오늘은 채우기보다, 읽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