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효 그리고 자기 소외에 관하여

풀리지 않는 숙제-부모에 대한 부채감

by 숨결

유년기, 나는 부모에게 적당한 물질적 지원을 받으며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내 입장에서 유년기에 정서적인 관심과 지원, 최소한의 스킨십 부재와 정서적 방치됨)


그러나 직장인이 된 이후, 엄마는 ‘딸의 삶에 대한 적극적 관여’가 불현듯 시작되었다.


직장을 멀리 구해서 살면 부모와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효라는 이름으로 주고받는 연락은 점점 정서적·경제적 강요로 바뀌었다.


엄마는 수시로

“부모가 없으면 네가 (온전히) 살 수 있을 것 같냐?”라고 말했다.

“왜 자신의 마음을 부모에게 솔직히 표현하지 않았어요?”상담사가 이렇게 물었을 때, 나는 당황스러웠다.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나는 왜 부모에게 “이러한 요구는 힘들어요. 숨 막혀요. 저도 제 삶을 생각하고 살아야겠어요. “라는 말을 할 수 없었을까? (수 없이 마음속에서 되뇌었던 말을)


엄마가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한 본인의 희생과 그 희생의 보상을 온전히 나에게 책임을 돌렸기 때문이다.


유교적 효를 근간으로 한 부모의 요구 앞에서

나는 늘 ‘자신이 효의 개념을 세우고 부모와 관계를 정립하기도 전에 부모에 의해 강요된 효를 행하며 감사해야 할 자식’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매달 생활비와 적절한 용돈, 애정 어린 관심과 연락을 하여 남들에게 효도받는 부모임을 입증해줘야 함.)


20년 넘게 ‘표면적으로는 평범한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죄책감과 부채감 그리고 자기 소외가 있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나는 늘 내면 깊은 곳에서

“부모가 버겁다. 왜 저럴까? 불편하다. 합법적으로 연락이 안 되는 이민을 꿈꾸는 감정과 함께 살았다.

일종의 현실도피를 꿈꿨다. 지금도 꿈꾼다. 부모의 강요가 흐르지 않는 다른 공기로 옮겨가고 싶다.


그 감정은 내 삶을 옥죄었고, 결국 ‘나 자신보다 남을 책임지려는 습성’으로 굳어졌고 중년에 이르러 철저히 자기 소외로 괴로워하는 중이다.

많은 영상을 보고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부모로서 당연히 받아들였던 ‘효’의 당위는,

결국 부모의 정신 건강과 나의 정신 건강,

그 사이의 ‘거리’라는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을.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 - 송길영


의무가 아닌 내 선택에서 시작된 가족관계이어야 함.

부모님을 챙기는 건 함께한 연한, 애정, 나의 여유가 내가 베푸는 것이고 부모님은 감사히 하는 것으로 관계가 대등해지는 것

당연히 모셔야지, 전통이야 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막막해질 수 있다.

자가 주체성, 독립성을 기반으로 상호 간 대등하게 핵개인의 태세

K-daughter (장녀) 콤플렉스
맛있는 걸 먹거나 예쁜 걸 보면 죄책감이 든다
우리 부모님이 나를 위해 희생했는데 내가 온전히 누리는 게 맞나? 부모님의 희생이 나를 형성해서 감사한 일이지만 누군가의 희생이 자립의 전제가 되는 사회는 문제가 되는 사회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원죄처럼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감사하되 연좌하지 말자.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_박우란


#1. 아이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부모는


안전하지 않은 시선과 사랑의 부재 속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주변의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려워하고 누구에게도 선뜻 마음을 열거나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아이만큼은 자신을 버리거나 소외시키지 않을 절대적 약자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 앞에서는 어른스럽고 성숙하게 처신하는 그들도

자신의 아이 앞에만 서면 웅크리고 있던 무의식 속 결핍투성이 아이가 튀어나와 거칠게, 그리고 끝없이 요구를 합니다.


아이는 거절할 수 없는 부모의 요구에 옳아

매 집니다. 부모는 자신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권력자이기 때문이지요.


#2. 무의식 속 감정 덩어리

어느 시점에서 멈추어 있는 감정 덩어리는 시간 개념이 없습니다. 결핍감괴 좌절, 외로움과 원망 등으로 응어리진 검정 덩어리는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의 그때에 그대로 멈추어 있으면서 현재의 나를 압도하고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지요. 이 아우성을 아무리 반복해도 끝나지 않는 것은 나 자신이 그 요구를 정확하게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니 스스로 애도할 수 없고, 끝없이 가족이나 타인을 향해 변형된 요구만 합니다. 그런데 자신도 제대로 모르는 요구를 싱대가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3. 누구를 위한 사랑인가

때로는 과도하게 퍼 주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무의식 속 불안을 보상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받고 싶었던 것을 타인에게 해 주지만,

회복은커녕 원망과 원한이 쌓입니다.


이것은 내가 주고 있는 행위가 정확히 누구를 향한 것이고,

무엇을 원해서인지 모른 채 행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신과 진심은 막상 기대한 무언가가 돌아오지 않으면

절망과 원망으로 바뀌고 분노하게 됩니다.

돌봄을 주는 행위를 통해 내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소진되기만 한다면,

잠시 멈추어서 내가 하고 있는 돌봄과 주는 행위에

어떤 기대와 욕구가 있는지,

어떤 무의식적 의도가 있는지 의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나의 돌봄이 온전히 내 앞에 있는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 의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나는 반복적으로 좌절하고 절망하며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돌봄은 내 앞의 타인을 거울로 삼아

나 자신에게 하고 있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거울이 된 타인은

그것을 고마워하기보다

묘한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금기어는

“내가 언제 그걸 해 달라 했어?

네가 좋아서 했잖아.”

라는 배은망덕한 태도를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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