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테이블과 무력한 시간
8장 〈무너진 테이블〉
아침 공기가 차갑고 바쁘게 스쳤다.
오늘 오후, 학교 토론회가 있다.
주제는 이미 공지됐고, 학부모 대표와 학생회장단에게도 안내가 끝난 상태였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토론회실 세팅을 마쳤다.
오늘은 3개 학년 수업이 모두 있는 날이었다.
학년마다 교실이 다르고, 수행평가 마감 기간이라 이번 주는 더 복잡했다.
1교시 수업 공지를 위해 5층 계단을 오르던 순간,
4층 연극실에 강사가 잘 도착했는지, 준비는 끝났는지를 생각했다.
그 짧은 찰나—발끝이 미끄러졌다.
시간의 속도가 느려졌다.
노트북이 허공에 떠올랐고, 슬리퍼 한 짝이 반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나는 공중부양하듯 천천히 4층으로 떨어졌다.
탁, 툭— 교과서와 노트북이 계단을 구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선생님, 괜찮아요?”
놀란 학생들이 달려와 흩어진 물건을 주워주었다.
어떤 학생들은 웃음을 참았다.
학교에서 교사가 공중에 뜬 모습을 본 게 신기하고 재밌었을 것이다.
슬리퍼, 교과서, 노트북.
노트북은 다행히 쿠션 있는 가방에 보관되어 큰 파선은 없었지만 교과서와 지도서가 갈기갈기 찢어져있었다.
왠지 모르게, 오늘 하루도 순탄치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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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교시 쉬는 시간.
모범교사 한 분이 연극실로 연락을 전했다.
“교감 정이슬 선생님이 찾으세요.”
5분 뒤 3교시 수업이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나는 급히 연극실 옆 엘리베이터를 타고 교감실로 향했다.
정이슬 교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토론회 주제를 왜 이렇게 했어요?.”
원초적인 질문이다.
순간, 말이 막혔다.
이미 한참 전에 결제까지 마친 사안이었다.
교감은 “주제가 마음에 안 드니 주제를 바꾸라”라고 했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드는 이뉴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 주제는 교육 3 주체의 설문과 학생회의 의견을 모아 선정된 것이었다. 대주제 아래, 학부모·교사·학생이 함께 논의할 소주제들이 세분화되어 있었고, 토론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사전 안내까지 끝내 놓은 상태였다.
“지금 주재를 바꿀 수 없습니다.”
춘희는 그렇게 말하고 수업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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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교시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범교사가 교실로 올라왔다.
“춘희 선생님, 정이슬 교감 알잖아요.
2교시 내내 내실에 와서 토론 주제에 대해 불만을 말하고 갔어요.
“주제 바꾸래요.”
“갑자기 어떤 주제로요?” 춘희는 대답했다.
교감은 ‘꿈끼 프로젝트’로 시험이 줄어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시험 과목과 일수를 늘리는 방안을 이번 토론의 주제로 하자고 했다. 해당 사안에 댜해서는 이미 교과협의회와 학부모의 의견 조율까지 끝난 시점이었다.
학생들은 학교 축제, 체험활동 장소, 체육복 디자인 변경 등 자신들의 삶에 밀접한 주제를 중심으로 논의하기로 되어 있었다.
춘희는 말없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프로그램 순서, 인쇄된 주제지, 이름표, 자리배치도—모두 새로 만들어야 했다. 교무실의 프린터가 쉼 없이 돌아가고, 문서 위엔 커피 얼룩이 번졌다.
“하아!! 토론회 모둠도 주제에 맞게 세밀하게 구성해 놨는데……..” 춘희는 절망적인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점심은 포기해야 했다. 사실 식사를 포기한다는 생각을 할 시간도 없었다.
춘희는 황당했다. 하지만 거절할 여력도 없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 유일한 공백이었기에 춘희는 굶주림 채 바뀐 주제에 맞게 자료를 수정하고 새로운 안내문과 모둠 배치를 다시 출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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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교시가 끝난 뒤,
토론회가 열릴 도서관은 아직도 어수선했다.
오전에 세팅해 둔 플로터 용지와 배치도를 전부 걷어내고, 새로 출력한 자료를 붙였다. 학생들은 준비한 원고를 버리고 새 문장을 써 내려갔다.
“선생님, 이거 이렇게 바꿔도 돼요?”
그들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렸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중앙의 긴 테이블이 시선을 끌었다.
‘이건 누구를 위한 토론회인가.’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권력이 남용되는 현실이
참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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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도서관에 들어서자,
춘희는 학생회장에게 자리 안내를 맡겼다.
사전 안내와 달라진 주제를 보고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춘희는 목구멍까지 “정이슬 교감이 지시한 겁니다”라는 말이 차올랐지만, 꾹 누른 채 애써 아무 일 없다는 듯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다.
교감은 마네킹 같은 미소를 지으며
환영 인사를 건넸고, 토론회의 개회를 선포했다.
하지만 춘희는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권력의 왜곡을 느끼고 있었다.
이 테이블의 진짜 주인은 교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장식품에 불과했다.
잠시, 춘희는 차라리 토론회가 엉망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생 임원단의 빠른 대응 덕분에
불행하게도 큰 문제없이 회의는 흘러갔다.
회의 중 누군가 음료수를 엎질렀다.
물은 테이블 표면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때까지 버티던 골반뼈 주변에 묘한 통증이 번졌다.
교감은 교육 주최자로서 테이블에 앉지 않았다.
한쪽 벽에 서서, 자신의 의도대로 회의가 흘러가는지
묘한 표정으로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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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난 뒤,
도서관에는 비어 있는 테이블만 남아 있었다.
춘희는 조용히 빔프로젝터를 끄고, 노트북 가방을 들었다. 하루 종일 감쌌던 긴장이 풀리자 허리와 엉덩이 주변에 통증이 스쳤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
춘희는 몸의 기운이 쫙 빠지며
운전석 안으로 깊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