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두 양어머니 #1

화려한 중년의 돌싱

by 숨결

교사가 된 뒤, 춘희의 저녁은 늘 같았다.

춘희의 첫 학교는 김포의 신설학교였는데 당시 신앙촌 집성촌이던 부지를 대기업에서 매각하여 브랜드 아파 든 대형 단지가 들어 선 곳이었다. 아파트 평수는 18평대에서부터 45평까지 다양했고 단지 안에서 빈부격차가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주민들이 입주하였는데 들리는 말로는 졸부들이 많다고 했다.


근무 시간과 구분 없이 출근 전, 후를 침해하는 갑질하는 학부모들의 전화와 메시지들이 춘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학부모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이어 온 해결되지 않은 지난한 자녀의 친구 관계 문제의 모든 책임을 담임에게 쏟아내었다.


퇴근 후 근무지와 일상의 경계를 세워야 했다. 운동을 가서 전화를 못 받는 이유, 지금 생각하면 퇴근 후 전화 수신을 거부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인데 당시에 어린 춘희는 스스로 명분을 만들어 억지로 경계를 설정했다. 경계 설정을 운동으로 잡은 춘희는 백화점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했다. 퇴근 후 네 시간씩 헬스와 수영, 그룹 엑서사이즈를 번갈아가며 몸이 부서지도록 운동을 했다. 운동은 정신 에너지를 신체 에너지로 전환해서 고통을 날리고 부수는 춘희만의 저녁 의식이었다.


절친한 한국체육대학교 출신 체육교사 동료가 웃으며 말했다. “너 국가대표 하려고? “그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춘희는 정말 도망치듯 운동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재즈 그룹 엑서사이즈 수업을 마치고 정수기 앞에서 식은땀을 훔치던 춘희는 화려하게 화장한 40대 중반의 여성을 보았다. 재즈 댄스 수업에서 누구보다 리듬을 잘 타던 여자였다.


저녁 7시,

보통의 기혼 중년의 여성이 집에서 밥을 할 시간에 매일같이 운동을 하러 센터에 오다니… 그 자체가 묘하게 인상적이었다.


춘희가 동갑내기 운동 친구와 세계 여행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녀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합류했다. “여행?” 그녀는 가볍게 받아치더니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살짝 코웃음 아닌 코웃음을 치며 “나는 세계여행을 했지.”


그녀는 세계여행을 일상의 언어처럼 말했다. 춘희가 오래 꿈꾸던 세계가 그녀의 입에서는 아주 쉽게 흘러나온 것이다. 남다른 춤 실력, 세계여행… 중년 여성에 대한 호감은 ‘사람’보다 그녀가 품고 있는 ‘세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날 이후, 센터에서 그녀와의 자연스러운 눈인사를 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운동 시간까지 맞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박에스더였다.


서로의 운동 시간대가 맞고 대화가 물 흐르듯이 이어 지자 둘 사이가 급격히 가까워져 마치 사촌언니와 동생처럼 서로의 경조사는 물론이고 일상의 대부분을 공유하게 되었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그녀의 집은 춘희 학교 바로 앞 아파트 단지에 있었다.


춘희가 토요일 오전 근무를 하는 날,

그녀는 춘희에게 퇴근하면서 검은깨 죽을 끓여놨으니 먹고 가라는 문자를 보냈다. 타지에서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생활하는 춘희에게 사람의 온기를 전하는 단비 같은 문자였다.


춘희는 퇴근 후 에스더 집에 갔다. 중형평수에서 혼자 사는 그녀의 집은 마치 외국 대사관저처럼 기품 있고 세련되었다. 생활감이 있는 잡동사니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외국살이와 여행을 하며 모은 인테리어 소품, 액자, 가구 그리고 세련된 식물 배치 등 그녀의 취향이 집안 곳곳에 묻어났다.


한쪽 벽 액자에는 영국 찰스 왕세자와 에스더가 함께 찍은 사진, 유명한 한복 디자인과 태국 여행을 간 사진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에스더는 춤만 세련되게 추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부터 세계를 무대 삼아 살아온 사람이었다. 1980년대부터 서클 렌즈를 착용했고, 젊은 시절에는 웨스팅하우스가 시공한 원자력발전소 고리 1·2호기에서 근무했다.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며 업무로 해외를 오갔고, 서양 문물을 초기에 체화한 얼리 어답터였다.


캐나다인 남편과 영국 시골, 필리핀에서 신혼생활을 했고, 경비행기를 타고 도시락을 싸서 여행을 다녔다고 했다. 에스더의 인맥은 싱가포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세계 곳곳에 닿아 있었다.


춘희는 어두운 청소년 시절에 문학 작품을 읽으며 상류층의 삶을 많이 상상하고 한 번쯤 진입해보고 싶다고 생각틀 했었다. 춘희는 에스더를 통해 춘희가 사는 레이어가 아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춘희가 몽상처럼 상상한 세계가 에스더를 통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춘희는 에스더가 정성스럽게 끓인 따뜻하고 고소한 검은깨 죽과 시원한 동치미를 먹으며 춘희가 상상한 이상적인 또 다른 엄마의 자화상을 보았다.


춘희는 도회적이고 세련된 신여성, 박에스더와 급속도로 친해졌다. 주말 저녁에는 막 사랑에 빠진 애인과 데이트를 하듯 에스더와 설레고 흥분되는 시간을 보냈다.

에스더와 있는 시간에는 경희가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춘희는 20대 초중반에 박에스더를 상상 속 엄마로 삼고 경희는 심리적으로 엄마 자리에서 쫓겨났다.

압구정의 하드락 카페, 하얏트 호텔의 밴드 클럽 공연, 청담동의 서클 클럽, 워커힐 호텔, 조선 호텔, 이태원의 재즈 바와 와인 동호회 활동 등 그녀의 안내로 화려한 주말이 시작되었다.


함께 밤문화를 즐기며 쇼핑을 하였고 춘희의 모델 같은 몸라인에 어울리는 코디를 해주어 춘희는 이제 내 삶이 바뀌는가?라는 환상적 세계에 살게 되었다.


서로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고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로 박에스더는 춘희 엄마 경희와 1960년생 동갑이었고, 생일은 고작 하루 차이였다.


무심히 찾아온 이 중년 여성은 또 다른 ‘양어머니’를 표상한 춘희의 첫 양어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