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 고아의 생존법
정서적 수치심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가장 깊게 숨는다.
인트로
스물여덟, 춘희는 프랑스로 유학 간 친구를 만나러 잠시 파리에 갔다. 샤를 드골 공항에 착륙하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저 멀리 떨어진 낯선 땅에서 춘희는 마치 오래전 엄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간 듯한 뜻밖의 편안함을 느꼈다. 춘희는 생애 처음으로 온전힌 자신이 되었다.
하지만 그 온전함은 잠시였다.
한국에 돌아오면 다시 오래된 가족의 그림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춘희는 알고 있었다.
추석 명절, 고향에 가지 않은 춘희
그해 추석, 춘희는 끝내 평택의 친정에 가지 않았다.
겉으로는 심한 허리 통증 때문이라고 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몇 달 전, 춘희는 암 의심 진단을 받고 조직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또한 직무 스트레스와 번 아웃으로 항우울제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예고 없는 불행이 쓰나미처럼 춘희에게 덮친 것이다.
그런 춘희를 위로하겠다며 찾아온 엄마 경희는 정작 춘희의 고통이 아니라 자신을 행복을 위해 춘희 집에 방문했다. 춘희는 버스 도착 시간에 맞춰 터미널로 배웅을 나갔다. 3시간 30분을 달려 춘희와 만난 경희는 춘희 차에 캐리어를 싣고 보조석에 앉았다. 경희의 첫마디는 “요즈음 건강은 좀 어때! “라는 말이 아니었다.
최근 경희는 조카와 갈등이 있었는데 조카가 경희에게 “이모는 40년 전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냐고”말을 했는데 그런 부분에 분노가 치밀어서 춘희에게 차에 타자마자 분노 섞인 하소연을 쏟아냈다.
춘희는 경희가 방문하기 전에 아빠 영도와 통화를 해서 대략적인 사촌언니와의 경희의 갈등상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춘희는 숨이 턱 막혔다.
“아, 진짜 심하다. 심해. 머리 아파~ , 저렇게 밖에 말을 못 하나. 정말 지겹다.”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경희는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중심적 언행이 점점 심해졌다.
집에 돌아와 간단히 경희가 가져온 왕만두를 먹는 동안에도 격양된 목소리로 사촌동생 이야기를 이어갔다.
춘희가 항상 느끼는 거지만 경희가 말하는 동안은 대부분 부정적인 말들이라 음식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맛보다 체하지 않으려고 더욱더 음식을 꼭꼭 씹었다.
경희는 다음날 아침 춘희가 눈 뜨기 전에 일어나 큰소리로 지인과 통화를 나누며
“딸 집에 있으니 정말 행복해~ 딸이 나를 위해 신경을 많이 써주네~ “
“매 끼니 밥도 열심히 차리고~” 라며 과장된 기분을 한껏 뿜어냈다.
그리고 아침을 먹으며 경희는
“집에만 있으니 숨이 막힌다”며 춘희에게 서울 여행을 하고 싶다며 춘희에게 말했다.
춘희는 업무를 대하듯 경희를 대했다. 최적의 5일 치 여행 계획을 순식간에 세웠다. 춘희는 감각과 취향이 뛰어나 비교적 적은 정보라도 최고의 여행 상품을 구성할 수 있었다.
춘희는 10kg 이상 살이 불어난 몸, 무기력한 표정 등의 이유로 경희와 다니며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다. 경희는 춘희에게 “살이 정말 많이 쪘네”라고 말하고 춘희의 정서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춘희를 트로피 삼아 셔터를 눌러댔다.
경희는 춘희의 한껏 부은 얼굴 사진을 별로 친하지 않은 지인들과 남동생의 여자친구에게 수십 장을 보내며 자신의 행복을 과시하며 ‘아픈 딸을 위로하는 엄마’가 아니라 ‘행복한 모녀’의 이미지를 무차별하게 타인들에게 전송했다.
경희에게 안방 침실을 내주고 춘희는 거실 소파에서 겨우 몸을 웅크리며 잠이 들었다. 경희는 춘희에게 “엄마 때문에 불편해서 어쩌니?”라고 말한 뒤 경희는 최대한 오래 머물렀다. 경희는 이따금 안방 침실에서 같이 자도 된다고 춘희에게 말했으나 춘희는 경희가 너무 거북했다. 마음이 거북하다는 느낌을 들기 전에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경희는 춘희의 마음속 어딘가에 있던
벼락을 동반한 소나기 같은 낯선 존재였다.
춘희와 경희는 함께 잠실 롯데타워를 구경하고 마무리하는 저녁에 갑자기 경희는 춘희에게 17년 전 경희가 중국과 캄보디아 여행을 갔을 때 왜 용돈을 왜 주지 않았냐며 20분 동안 분노를 쏟아냈다. 당시 춘희는 매달 생활비를 경희에게 입금한 상태였다. 춘희는 이 상황이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아~ 정말 당시 상황이 기억 안 나나?”
정말 내 상황을 알면서 저런 말을 한다고? “
경희와 서울 여행 중 뜬금없는 경희의 분노가 일었다.
경희의 기본 정서는
“네가 해 준 게 뭐 있어? 내가 말을 안 하니 사는 게 사는 거인 줄 아냐? 죽고 싶다.”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춘희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심장은 조였다가 놓였다가를 반복했고, 눈앞이 잠시 흐려졌다. 춘희는 운전하며 정신과 마음을 한껏 두들겨 맞은 느낌이 들었다.
아빠의 정서적 부재, 경제적 무능, 해소되지 않은 엄마의 욕구불만, 분노가 춘희를 지치게 했다. 이제는 부담스럽다. 싫다. 버겁다가 아닌 그들을 대하는 실오라기 같았던 마음의 힘이 죽었다.
그래서인지 경희의 손이 스치기만 해도 춘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감과 정서적 긴장을 느꼈다. 그녀는 ‘위로’가 아니라 통제와 침범의 방식으로 춘희의 공간을 차지했다.
그 순간 춘희는 깨달았다. 자신이 버티고 있던 자리는 ‘딸의 자리’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경희의 분노를 떠받치는 받침대일 뿐이라는 것을
딸이라는 위치만 존재하고 딸로서 존재할 수 없는 자리
춘희는 알았다.
자신이 감당해 온 관계는 ‘딸’이 아니라, 분노의 탱크를 대신 채워주는 조용한 저장고였다는 것을.
그렇게, 춘희는 오래된 자리에서 조용히 빠져나올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