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정신분석 상담 #3>

유년기의 가족상담

by 숨결

춘희는 상담 전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키는 게 쉽지 않았다. 상담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한 번 일어났다가 다시 누웠다.


피곤했다.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고 나면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그래서 시간이 되자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소파 밑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전화를 받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이면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해가 저물기 시작한 오후 다섯 시. 빛이 서서히 빠지면서 거실의 공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상담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가족 이야기를 이야기해 볼까요?.” 춘희는 고개를 조금 들어 어둡게 내려앉은 거실을 바라봤다.


춘희는 가족? 하면 제일 먼저 엄마 경희가 떠올랐다.

엄마 경희는 매달 전화를 했다.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자신에게 생활이 어려우니 생활비를 보내라고 했다. 엄마 말대로 보내지 않으면 잘못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정확히 이 감정이 무엇인지 춘희는 잘 몰랐다.


상담사의 말은 뜻밖이었다. “어머니의 표현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일 수 있어요.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다는 느낌에서요. 단순히 돈이 필요해서가 아닐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돈, 돈, 돈 하던 경희의 거친 언행은 늘 버거웠다. 그래서 경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릴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을까요?.”전화기 너머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춘희의 시선이 천천히 과거로 넘어갔다. 아빠 영도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만으로도 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아빠는 엄마에게.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라고 말했다. 소리는 갑자기 커졌다. 외할머니를 빗대어 경희에게 “너는 창녀야”라고 말했다. 그 단어는 춘희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거의 매일 밤. 영도는 회사 이야기를 했다. 아빠 말에 의하면 사람들은 모두 권모술수에 능한 죽일 놈과 기회주의자들이었다. 밤은 길어졌고 고성은 밤새 멈추지 않았다.


춘희는 생각했다.

이 집에서 언젠가는 뉴스에 나올 일이 생길 것 같다고. 그래서 부엌 하부장에 있던 식칼을 조용히 꺼내 행주로 감싸 옷장에 숨겨두었다.


경희는 춘희의 중고등학생 시절 여러 차례 집을 나갔다. 춘희에게 어떤 설명이나 인사는 없었다. 춘희가 하교하고 돌아오면 아파트 단지 한편 잘 정돈된 나무 밑 재활용 의류수거함에 익숙한 경희의 옷들이 쌓여 있었다.


춘희는 그 앞에 지나가다 옷더미를 짧게 응시한 후 “엄마가 집을 나갔구나.”라고 생각했다. 다른 감정은 딱히 들지 않았다


매 해 영도의 생일날은 공포의 날이었다. 영도는 마치 귀신이라도 씐 사람처럼 정확히 자신의 생일날에 생일 상을 뒤엎었다. 영도는 고성을 고래고래 질렀고 엄마와 싸우고 집을 나갔다.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는 보도블록 한편에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는 아빠 영도


춘희는 수치스러웠다. 경희는 춘희에게 말했다. “가서 베개 놓아주고 와.”춘희는 짜증이 났다. ”내가 왜?” 그렇게 영도를 생각하면 본인이 하던가…“ 몸이 파르르 떨렸다. 춘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거리 한가운데 미친 사람처럼 술에 곯아떨어져 누워있은 사람이 내 아빠라는 생각이 비참했다.


“그때 감정이 어땠나요?.”전화기 너머로 조용한 질문이 들렸다. 춘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감정.

춘희의 가슴이 바위처럼 단단히 굳어져 감정이라는 언어를 발굴하기가 너무 힘겨웠다. 춘희의 가슴속에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적절한 단어를 골라 표현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하기 싫었어요.”라고 춘희가 말한 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상담사는 다시 물었다.

“그때 중학생이었던 춘희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숨이 잠깐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부끄러웠어요.”


당시 상황이 떠올랐다. 매일 밤 울고 아침이 되면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일상이었다. 이런 상태로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춘희는 한껏 구겨진 교복을 입고 지각을 하면서도 아침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철도길을 건너고 오래된 주택가 골목을 지나며 어젯밤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