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웃고 울게 만드는 그 녀석
홍보나 마케팅, 광고, 디자인 등의 분야에 뼈를 묻을 생각으로 대학교에서 전공을 선택했다면 그 녀석은 중요할 때마다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녀석을 피하는 건 쉽지 않다. 아니, 내 경험을 빌어 말하자면 절대로 못 피한다.
스스로 을이 되겠다고 자청해서 이 바닥에 들어왔는데 조금 힘들다고 피한다? 말이 안 된다. 시장에서 제대로 승부하고 싶다면, 하루빨리 고객들에게 인상적인 이미지를 남기고 싶다면 녀석을 사랑해야 한다. 녀석이 세워놓은 까마득하게 높은 방어벽을 무슨 일이 있어도 뚫어야 한다. 때로는 애정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증오의 대상이 되는 그 녀석의 이름은 ‘입찰’이다.
아, 녀석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프리랜서로만 일하며 소규모 계약만 하면 된다. 입찰 과정이 너무 까다롭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들도 없지 않다. 몸은 편하지만 회사를 키우거나, 큰 규모의 일을 하는 건 포기해야 한다. 일을 계속하다 보면 어차피 힘든 건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끝까지 가고 싶다면 입찰을 포기하면 안 된다.
입찰은 정부와 공공기관, 민간 회사에서 실시하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중요한 건 전자다. 공신력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인다. 정부나 공공기관과 일을 했다는 증명만 해도 무사통과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정부나 공공기관의 입찰은 나라장터에서 일괄 진행한다. 나라장터는 조달청에서 운영하는 공공기관 온라인 전자조달 및 입찰 시스템이다. 발주처와 입찰 참가자들 모두에게 편리한 시스템이다. 본인의 사업 분야를 검색만 하면 참가할만한 입찰 건이 있는지 없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입찰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입찰에 참가하기 위해 갖춰야 할 자격과 조건이 엄청나게 까다롭다는 것이다. 참가자격 증명서를 비롯해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자격증이 6-7가지는 된다. 어떤 경우에는 장비를 들여놓아야 할 때도 있다.
실적의 경우 신생 업체는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다. 일을 많이 해서 하루라도 빨리 자격 조건이 되는 실적을 축적해 놓아야 한다. 그나마도 3년이 한계이기 때문에 계속 일을 해서 실적을 착실하게 쌓아놓는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로는 경쟁에서 무조건 1등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까운 2등은 의미 없다. 1등이 아니면 다 꼴등이다. 1등을 해야 회사를 운영할 수 있고,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 몇 번만 1등을 놓치면 회사 통장 잔고가 0에 수렴한다. 입찰은 총 대신 머리와 경험을 무기 삼아 싸우는 전쟁터나 마찬가지다. 듣기만 해도 살벌하지 않는가? 갑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사내가 전쟁터라면 사회는 지옥이다’라는 말은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거상 임상옥은 ‘장사의 으뜸은 신뢰’라고 생각하고 평생 동안 거래 관계에서 신뢰를 지키고자 애를 썼다.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 거래라도 신용에 해가 될 것 같으면 거래를 하지 않기도 했다.
세월이 오래 흐르고 장사가 비즈니스로 바뀌었지만 기본은 변하지 않았다. 입찰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항목 역시 신용이다. 안타깝게도 업체 대표의 얼굴로 신용을 판단하는 배짱 좋은 거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뢰는 증명서나 자격증으로 실체를 갖추었다.
입찰에서도 신뢰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발주처는 가능한 한 꼼꼼하게 조건을 내세워서 믿음이 가지 않는 회사들을 걸러낸다. 사업 일정은 제한되어 있고, 참여하려는 사업체들이 많은 탓에 이 과정은 신속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이때 필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증명서다.
처음 입찰에 참가하려는 초보 사장들을 질리게 만드는 녀석들이 바로 이 증명서들이다. 어떤 증명서가 필요한지도 모르고, 어디서 어떻게 발급해야 하는지도 오리무중이다. 한글로 설명이 되어 있지만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설명에 대한 설명을 다시 들어야 할 판이다. 후배 중 한 명도 12년의 직장 생활 끝에 독립해서 1인 기업을 차렸으나 입찰 참가에 필요한 자격증과 증명서 종류를 보고 기가 질린 끝에 입찰을 유보 중이다.
입찰에 참가하는 회사들은 최소한 해당 분야에서 5년 이상의 경력과 다양한 사업을 경험하며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들임을 증명서와 자격증으로 보여준다. 실적증명서는 일을 수주한 기업에서 확인을 받아야 하므로 위조할 수 없다. 발주처가 요구하는 실적이 없다면 제아무리 탁월한 실력을 가진 회사라도 군침만 삼킬 수밖에 없는 곳이 입찰 무대다.
수많은 경력과 증명서를 제출하지만 소심한(?) 발주처는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힘없는 을들은 주님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입찰보증보험, 계약이행보증보험, 하자이행보증보험까지 들어야 한다.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는 돈들이다.
이미 인이 박힐 대로 박힌 입찰이지만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엄청난 참가 서류와 증명서, 자격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제안요청서를 앞뒤가 안 맞게 쓰거나, 필요 서류를 한 군데에 모아서 적지 않고, 서류 곳곳에 숨겨 놓는 바람에 참가 신청 업체들이 골탕을 먹는 경우도 있다. 실무자의 무능을 참가 희망 회사들이 대신 짊어지는 격이다.
참가 자격을 갖추는 것도 힘들지만 요구하는 서류를 챙기는 것도 일종의 테스트라고 할 수 있다. 끝까지 안심하면 안 된다. 강원도의 모 대학 입찰 신청 시에는 서울의 모 회사가 서류 접수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세완납증명서의 유효기간이 지난 게 이유였다. 서류를 들고 온 직원은 회사로 전화를 하며 접수자에게 사정을 봐달라고 이야기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결국 접수에 실패한 채 돌아가야 했다. 2주 간 팀이 야근을 하며 고생한 흔적들이 고작 서류 한 장 때문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누락된 서류들이 없는지 항상 이중으로 확인한다. 이 정도로 복잡한 단계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참여를 허락받는 것이니 이것만으로도 믿을 수 있는 회사로 인정받을 만하다.
복잡한 검증 단계는 짜증을 유발하지만 장점도 있다. 자칫 잘못하면 아수라장이 될 수 있는 입찰의 교통정리를 해줌으로써 발주처와 참가 회사들의 번거로움을 줄여준다. 심사위원들의 고생도 크게 줄어든다. 노련한 발주처 실무자는 입찰을 두 단계로 나누어 최종 심사 대상을 5곳 이내로 줄이는 요령을 발휘한다.
건설이나 공사처럼 기본 틀이 정해져 있고 가격 비중이 큰 입찰은 크리에이티브가 상대적으로 비중이 덜 하다. 광고나 디자인, 마케팅, 홍보는 가격이 비싸더라도 광고주가 선호할 수 있는, 기발하면서도 차별화된 안을 제안하는 게 중요하다.
입찰 금액이 백억 단위까지 가는 광고의 경우 주관적으로 봐도 A등급 회사들의 크리에이티브가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회사의 경쟁력은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재 확보에 달려 있기에 연봉이 높고 이직도 활발하다.
마케팅 쪽도 크리에이티브가 중요하다. 최근 옥외 홍보의 경우 가상현실, 디지털 기술 등 첨단 기술을 동원하는 경우도 많기에 최근 기술 트렌드 파악과 제안 적용에 소홀히 하면 탈락의 고배를 마실 수 있다. 평상 시 부지런히 첨단 기술과 제안과의 접목점을 찾아야 한다.
디자인 분야는 두 분야에 비해 차별화가 어렵다. 훨씬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기술이나 기발한 크리에이티브가 들어갈 여지도 상대적으로 적다.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실력이 평준화되기 때문에 차별화가 힘들다. 선수들끼리의 경쟁은 그래서 힘들다. 때로는 운칠기삼의 법칙이 승부를 좌우한다.
한 번은 이런 날도 있었다. 12명의 심사위원들을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마치자 심사위원장이 “시안 심사를 한 이래 이토록 프레젠테이션을 잘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며 극찬했다. 민망하기도 했지만 우리 제안이 좋다는 이야기를 돌려 말한 것이라 생각하고 좋게 받아들였다.
그 경쟁에서 우리는 졌다. 이렇게 극찬을 받은 PT를 지다니? 팀원들과 나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원인을 짐작컨대 나이가 있는 관리자들은 우리에게 점수를 준 반면, 젊은 여성들이 대부분인 실무자들은 현재 거래 중인 회사에 몰표를 준 것 같았다. 심사위원들의 의견 차이가 그렇게 갈리는 경우도 드물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점은 졌다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입찰이라도 승패가 걸려 있다. 지면 기분이 더럽다. 이기면 속된 말로 기분 째진다. 회사 분위기도 좋아지고, 기념으로 회식을 벌인다.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 말이 필요없다. 입찰 결과로 우리는 웃고 운다.
이제는 결과를 거의 확실하게 예감할 수 있다. 보는 눈이 생긴 것이다. 될 것 같다 싶으면 여지없이 된다. 안 되는 경우는 상위 1% 이내의 선수들과 맞붙었을 때다. 소수점 이하로 승부가 갈리기도 한다. 이때만큼은 져도 기분은 좋다. 할 수 있는 걸 다 했기 때문이다.
을이라고 입찰에 참가만 하는 건 아니다. 이따금 초청을 받아 심사위원으로 갈 때도 있다. 을에서 갑이 되는 순간이다. 심사석에 앉으면 발표자의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던 단점들이 보인다. 내 단점을 고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심사한다.
18세기 영국 어부들은 북해에서 청어를 잡자마자 냉동을 해야 했다. 런던으로 돌아오는 중에 청어들이 모두 죽어버리는 바람에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런데 유독 한 어부만 청어를 산 채로 가져와서 높은 가격에 팔았다. 어부의 비결은 메기였다. 메기 몇 마리를 청어들 사이에 넣어 놓으면 청어들이 메기를 피해 달아나느라 죽지 않았던 것이다. 절묘한 한 수가 아닐 수 없다.
입찰은 메기이고 우리는 청어나 다름없다. 실제 상황과 다른 점이 있다면 청어는 메기를 피해야 살 수 있지만, 우리는 메기를 잡아야 살 수 있다는 것 정도다. 입찰이 없으면 우리는 생기를 잃는다. 긴장감도 떨어질 것이다. 긴장감이 떨어지면 동기 부여도 되지 않는다. 실력을 갈고 닦을 필요도 없다. 일도 크게 줄어서 경영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긴장감 속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처음에는 고통스럽다. 수정에 수정을 반복하는 과정은 다시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혹독한 과정을 거친 후 1등을 차지하는 쾌감은 마약과도 같아서 좀처럼 잊기 어렵다. 결과에 울고 웃으면서도 우리가 대부분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이유다. 미친 듯이 일하는 과정에서 얻는 급격한 실력 향상은 일종의 보너스다.
발주사 쪽에서도 공정한 경쟁을 통해 늘 새로운 제안을 받아볼 수 있다. 예년에 계약을 진행한 회사들이 나태할 수 없도록 직간접적으로 자극을 줄 수도 있다. 경쟁 과정에서 가격이 내려가니 경제적으로도 이익이다.(물론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갑의 입장에서만 좋은 경우도 많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뤄보겠다.) 제대로만 활용할 수 있다면 입찰은 좋은 제도다.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백만장자이자 자기계발 컨설턴트인 롭 무어는 “기회는 어떤 모습으로 올지 모른다. 행운의 모습일 수도 있고, 불행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입찰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긍정적으로는 우리를 알리고, 고객사를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만 부정적으로는 힘을 빼고 참가비만 낭비하게 만들며, 불필요하게 절차만 복잡한 쓸데없는 제도일 수 있다. 어느 쪽을 볼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 있다. 불행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행운으로 바꿀 수 있다. 입찰을 사랑하자. 안 된다면 될 때까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