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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 오리 Jul 05. 2024

필름이 이야기하는 홀로 됨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어, 인연.” 인연이라는 불교적 개념을 서구권에 소개한 것으로 주목받은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는 아이러니하게도 분리, 소외, 홀로 됨을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첫사랑으로 기억되던 나영과 해성이 20대가 되어, 또 30대가 되어 재회하는 스토리는 두 사람의 인연, 사랑을 떠올리게 하지만, 영화 전반에서 그들을 철저히 분리함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인물이 데이트하던 장소의 독특한 조형물은 마주 보는 듯 마주 보고 있지 않으며, 나영이 ‘노라’라는 새 이름을 만들어 캐나다에 이민을 떠날 때는 가파른 계단을 통해 수직적으로 이동하는 나영과 평평한 길을 마저 걸어가는 수평적 이동성을 보이는 해성의 대비를 볼 수 있다. 20대가 되어 재회한 두 사람은 스카이프(Skype)라는 화상통화 매체로 연결된 듯 분리되고, 30대가 되어 미국에서 직접 만난 둘의 모습은 한 프레임 안에 좀처럼 담기지 않는다. 강력한 카메라의 힘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각자 다른 프레임 안에서 따로 떨어져 존재한다. 아주 가끔, 그들이 한 프레임 안에 담길 땐, 계단의 난간으로, 지하철의 손잡이 기둥으로, 그 사이를 나눠, 하나지만 하나였던 적이 없는 패치워크(Patchwork)같이 분리되어 있다. 영화는 정교한 연출로 분리를 강조하며 인연을 새롭게 정의하려 한다.           


소외되고, 소외되고, 소외되는,     

  바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양인 여성과 동양인 남성, 그리고 대화에 어울리고 있지 못하는 백인 남성.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그들의 관계를 추측하는 제삼자의 대화로 시작한다. 관객은 마치 그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세 인물의 관계에 집중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빈번히 소외되는 위치에 놓이는 동양인이 서로를 마주 보며 대화하는 장면을 길게 배치함으로써 해당 오프닝에서는 마치 백인 남성을 소외시키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작품이 운명적 만남, 전생의 연속과 같은 판타지적 개념의 인연을 넘어 소외, 홀로 됨의 맥락에서 인연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관계를 추측하는 대화가 끝난 후에는 주인공 노라의 미디엄 클로즈업 샷으로 이어진다. 노라가 스크린 너머를 바라보며 24년 전으로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에서 관객은 앞으로 이들의 관계에 주목해야 함을 강렬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십여 년 전 첫사랑인 노라와 해성, 그리고 노라와 결혼한 유대인 작가 아서의 색다른 관계성에선 소외감이 바탕이 된다. 캐나다와 미국 사회 내 동양인 여성 노라와 유대인 아서에서 관계가 성립되기도 전의, 매우 인종과 결부되는 초기의 소외감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언어를 매개로, 영어로 대화하는 둘 사이에선 해성이 소외감을, 한국어로 대화하는 노라와 해성 사이에선 아서가 소외감을 느낀다. 노라와 아서의 부부관계는 해성을 홀로 되게 하고, 해성과 노라의 오랜 추억은 아서를 홀로 되게 한다. 소외와 분리, 홀로 됨의 굴레에서 이들의 관계는 서로를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방향으로 이끈다. 노라와 아서가 처음 ‘인연’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그들은 서로를 인연이라 정의하지 않았고, 노라와 해성도 결국 엔딩 시퀀스를 통해 이번 생엔 인연이 아님을 시인하지만, 이 영화에서 서로가 인연임을 인정하는 유일한 부분이 바에서 해성과 아서가 서로를 인연이라고 칭하는 부분인 점도 흥미롭다. 남녀의 사랑이 인연이라 이야기하던 기존 영화적 틀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인연의 시작. 인연과 전생의 개념이 새롭지 않은 아시아권 관객에게도 이는 색다르게 다가왔으리라.          


노라와 나영     

  인물의 관계에 관하여 또 하나 눈에 띄는 분리성은 나영과 노라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묘사하는 부분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노라는 해성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네가 기억하는 나영이는 여기 존재하지 않아. 근데, 그 어린애는 존재했어. 네 앞에 앉아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야. 20년 전에, 난 그 애를 너와 함께 두고 온 거야.” 해성이 기억하는 나영은 노라에게서 찾을 수 없다. ‘그 아이와 나는 다른 사람이야.’라는, 해성의 고백에 대한 거절이자, 노라의 미래를 위해, 어린 자신과 그의 첫사랑과 한국을 떠나보내는 완곡한 표현. 이 대사 이후 이어지는 엔딩 시퀀스는 그렇기에 관객이 더욱 노라에게 몰입하게 한다. 해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아주 긴 길을 혼자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모든 관객이 여성 주인공의 눈을 가지게 되는 몇 안 되는 매우 희귀한 영화적 순간을 제공한다. 자신이 두고 온 어린 나영과 첫사랑과 고향을 꿈과 같이 잠시 만나고, 다시 그들과 오래도록 헤어지는 순간은 누구든 경험해 보았을 상실감과 혼자 남겨진 느낌에 관하여 엄청난 공감과 몰입을 불러온다. 아주 긴 거리를 홀로 걸어가는 노라의 모습을 수평적인 카메라 워크와 롱 테이크로 표현함으로써 관객은 노라의 감정과 생각을 그 시간만큼 오래 곱씹어볼 수 있다. 긴 문장의 마침표와 같이 집 앞에서 노라를 기다리는 아서는 카메라를 멈추게 하고, 노라가 마음 놓고 펑펑 울게 하고, 관객이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한다. 엔딩 시퀀스의 음악이 크레딧까지 이어지는 것에서 인물의 정서를 오래 유지하고 몰입하게 하는 힘이 청각적 요소, 영화 음악에도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타인으로서의 아서     

  마치 타인이라는 의미의 Other와 비슷하게 발음되는 아서(Arther)는 작중 가장 소외되는 사람일 수 있다. 전통적 플롯이나 우리 사회의 통념과 달리 동양인 여성과 지극히 한국적인 남성 캐릭터는 서양의 남성 캐릭터를 소수자로 느끼게 한다. 흥미롭게도 아서가 첫사랑을 갈라놓는 백인 남편 캐릭터일 것이라는 관객의 예측을 아서의 대사로 직접 부인하며 아주 새로운 캐릭터를 구성한다. “어린 시절 연인이 20년 후 재회해서 운명의 연인임을 깨닫는다. 그 이야기에서 난 운명을 가로막는 사악한 백인 남편이고.” 이 영화엔 악한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라는 악역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인물이 멈춰서도 끊임없이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영화 속에서 시간은 단 한 번도 거꾸로 흐르거나 멈추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만 흘러 노라와 해성의 인연을 “그때 보자”라는 대사와 함께 다음 생으로 미룬다. 아서는 그런 악한 역할은 시간에 맡겨 두고, 어쩌면 소극적인 방법으로, 또 어쩌면 가장 성숙한 방식으로 서로를 외롭게 하는 세 인물의 관계의 매듭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캐릭터다.

  디아스포라적 관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이주자가 느끼는 허전함을 가장 대표하는 인물 또한 아서이다. 꿋꿋하고 당찬 노라에게선 느끼지 못했던 소외되는 것에 대한 설움 같은 것은 아서를 통해서 더욱 느껴진다. 영화의 몰입도를 가장 끌어올리는 부분 또한 아서의 등장부터다. 언어도, 어린 시절의 추억도, 그 무엇도 공유하고 있지 못하는 아서는 홀로 됨의 정서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아서는 동양인인 노라와 해성으로 표현하면 진부할 이 외로움의 감정을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서가 표현하는 복잡한 정서는 파트너인 노라에게 자연스레 이어지면서 엔딩의 효과를 더욱 극대화한다. 더 나아가 이 인물은 자연스레 해성과 대비를 이루며 이야기의 결말로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아서와 노라는 언제나 서로의 곁에 있는 사람이고, 반대로 해성과 노라는 서로에게 떠나가는 사람이었다. 이 점이 엔딩을 설득력 있게 한다.          


클리셰로 유머를 더하다     

  감독은 나영처럼 어린 시절 이민을 떠났다. 직접 영화에 자전적 요소가 반영되었다고도 밝힌 그녀는 나영과 함께 한국의 모습도 이민을 떠나오던 몇십 년 전 그곳에 두고 왔는가? 영화 속 한국의 모습은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는 셀린 송 감독의 말대로 그녀가 이민을 떠나오던 과거의 한국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숙취로 고생하는 외아들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음식과 숙취해소제를 준비하는 헌신적 어머니와 같은 모습은 과거에 자주 등장하던 가정의 모습과 닮아있다. 노라의 초등학생 시절 캐나다의 모습과 그녀가 20대가 되고, 30대가 되어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은 뉴욕의 모습은 역시 감독이 직접 최근까지 경험한 사회여서인지 자연스러운 고증이 되었지만, 그에 비해 해성이 사는 한국의 모습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또 어떤 면에서 이것을 희극적 요소로써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선 지극히 한국적인 남성 캐릭터에 배우 ‘유태오’를 캐스팅한 것도 중요하게 다뤄볼 수 있다. 유태오 배우의 성장배경을 아는 관객은 이 캐스팅이 매우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라 유창한 영어 실력에 자유분방한 캐릭터로 사랑받은 그가 영화 속에서 콩글리시를 쓰는 소심한 한국 남성을 연기하는 모습은 새로우면서도 꽤 유머러스한 자극으로 다가온다. 한국을 고정적으로 묘사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기술의 혁신, 활발한 K-콘텐츠 산업 등으로 알려진 한국 사회를 다시 과거의 진부한 이미지로 회귀시키는 것이 이 영화의 또 다른 흥미 자극 요소일지도 모르겠다. 또 플롯의 흐름을 보면 노라가 기억하는 한국의 모습을 유지하는 편이 노라가 느끼는 향수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더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대사에서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진부한 표현을 ‘작업 걸 때 쓰는 말’이라는 식으로,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부분 또한 클리셰를 현명하게 이용한 예이다. 클리셰를 유지하거나 완벽히 붕괴하는 방식으로 영화에 유머를 가미하는 것이 인상 깊다.


정교한 카메라의 힘     

  소설, 음악, 극, 영화. 다양한 예술 장르는 하나 같이 ‘이야기’ 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영화가 다른 분야와 구별되는 가장 큰 요인은 단연 ‘카메라’다. 관객은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만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작가가 카메라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는지를 결정하는 일이 영화의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셀린 송 감독은 카메라 워크를 아주 정밀하게 계획하여 영화를 구성하고 있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카메라 워크의 기준을 엔딩 씬에서 결정했다고 말했다. 해성과 노라가 우버까지 함께 걸어가고 노라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을 각각 어느 쪽으로 할 것인지에 관한 의논에서 감독은 영화 전반의 기준이 될 한 가지 답을 내놓았다. 그들이 걸어가는 긴 거리를 타임라인이라고 할 때, 해성과 노라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그들은 과거의 인연이며, 특히 노라는 나영을 과거에 두고 왔다고 표현했고, 둘의 모든 관계성은 결국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다. 노라는 해성과 과거로 걸어갔다가 그와 헤어진다. 그리고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노라는 기다란 길을 걸어간다. 앞에서 시간이 이 영화에 유일한 악역이라 언급했던 것처럼, 이 영화 속에서 ‘시간’은 인물의 관계, 대사, 카메라의 움직임과 같은 대부분의 영화 요소에 영향을 준다. 특히 이 아주 강렬한 인상을 주는 엔딩 시퀀스를 기준으로 카메라의 움직임을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제한하는 점이 이 영화의 작품성을 높이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접속>과의 상호텍스트성     

  해성과 노라의 20대 때의 재회 장면을 보면서, 자연스레 한국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1997년 작 <접속>을 떠올릴 수 있다. <접속>에서는 PC 통신, <패스트 라이브즈>에서는 페이스북과 스카이프를 통해 영화라는 미디어 속 통신 장치라는 또 다른 미디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이 기능하는 방식이 또 전혀 다르다는 점도 자세히 다뤄볼 수 있다. 두 작품은 모두 두 인물이 각자의 공간에서 매체를 통해 만나고 소통하는 장면을 다루고 있지만, <접속>에서는 새로운 인연의 시작, <패스트 라이브즈>에서는 과거 인연과의 재회라는 대비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자에서는 새로운 인물을 만나는 설렘을 다루기 위해 익명성을 포함하는 PC 통신이라는 매체를 활용하였고, 후자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영상 통신 매체를 활용하는 점도 흥미롭다. 반대로 두 작품 모두에서 각각의 매체를 사이에 두고 갈등, 말다툼, 오해가 발생하는 장면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찾아볼 수도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인스타그램과 같이 최근 유행하는 SNS가 아닌, 페이스북, 스카이프 같은 비교적 오래된 매체와 그 매체가 주도하던 시절을 빌린 것 또한 어떠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접속>과의 상호텍스트성을 떠올려 내는 데 도움을 준다는 생각이다. 셀린 송 감독의 부친이 <넘버 3>로 잘 알려진 송능한 감독임을 고려할 때, 감독이 해당 작품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치며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인연과 전생이라는 윤회적이고 불교적인 개념을 서구권 문화에 소개했다는 의의와 더불어, 소외, 홀로 됨의 미학과 함께 동양인에게도 새로운 의미의 인연에 관해 생각해 보도록 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을 받을만하다. 한국의 시간을 고정적으로 그려냈다는 부정적 평을 마주하긴 했지만, 과거에 대한 향수, 첫사랑의 추억과 같이 아날로그적 감성을 가지고 있었어야만 했던 영화적 특성을 고려할 때, 그 선택이 부적합하다고는 볼 수 없다. ‘시간’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가지고 영화를 아주 정교하게 풀어낸 것에 있어서 충분히 찬사를 받을만한 작품이며, 철저하게 계산된 카메라의 움직임과 오묘한 호흡을 지닌 세 주연 배우의 연기가 돋보인다. 유머러스한 요소를 놓치지 않았음에도 영화 전반을 사로잡는 특유의 쓸쓸함과 고독함, 그리고 소외감과 함께함의 양가감정을 유지하는 점이 인상 깊다. 영화 <접속>과의 상호텍스트적 요소 또한 재밌게 다뤄볼 만하고, 해당 작품이 관객의 개인적 경험에 따라 매우 공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전혀 공감되지 않는 영화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또 이 공감을 유도하는 장면이 누군가에겐 첫사랑의 기억과 연결되어 존재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자신이 소수인 사회에서 느꼈던 홀로 됨의 감정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 해당 영화가 관객에게 메시지를 주입하는 작품이 아닌, 생각하고 다양하게 감상하도록 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작품 전면에 내세웠던 노라와 해성이라는 두 인물보다도 아서라는 인물에게서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찾아볼 수 있다는 점 또한 작가가 작품 속 인물을 입체적으로 구상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35mm 필름으로 담아낸 감성적이면서 또 현실적인, 만남과 헤어짐에 관한 작품,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 2023년의 좋은 영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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