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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가 잊은 여성을 다시 무대로.

드라마 <정년이>(2024) 텍스트 비평

by 글쟁이 오리

여성의,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 <정년이> 속 기호 분석

tvN 주말 드라마 <정년이>는 2024년 하반기, 국극 무대를 직접 소화하는 배우의 놀라운 열정과 ‘여성국극’의 개념을 대중적으로 알렸다는 것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국 드라마 역사 상 이토록 여성으로 가득한 작품이 있었던가. 많은 사람이 현대 사회에 성별 간 격차가 없으며 현대의 미디어도 편견, 차별과 거리가 먼 텍스트를 매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 주위의 대중 미디어 콘텐츠를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시선이 담겨있는 작품이 허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년이> 텍스트의 1차 의미는 ‘정년’이라는 한 소녀의 여성국극 배우 되기 프로젝트이다. 사실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워 극 전반을 이끌어간다는 것에서 한국 드라마계에 여성 중심 드라마의 장을 여는 중요한 2차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 최근 드라마 중 여성 서사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던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같은 경우는 한국판 ‘델마와 루이스’라는 호평을 듣기도 했으나, ‘남성과의 연애’라는 코드를 끝내 놓지 못했다. 그러나 해당 드라마는 남성 캐릭터의 비중을 완전히 없애거나 축소하면서 대놓고 여성주의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고, 이것이 성별 간 갈등이 심각해진 최근 한국 사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해당 작품은 매우 노골적인 방식으로 남성 위주의 대중문화 텍스트를 비꼬며 여성만을 극의 전반에 내세우고 있다. <정년이>의 남성 등장인물은 정년의 조부, 방송국 피디, 고수(敲手), 사업부 부장, 극작가 정도뿐이다. 이 중에서도 극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은 방송 국 피디인 박종국, 사업부 부장 고 부장 정도이며, 이들은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 인물들 사이 이항 대립적으로 존재한다. 정년이를 비롯한 매란 국극단의 여성 인물은 “꿈을 좇는 찬란한 존재”인 반면, 주요 남성 캐릭터는 “악하고 뒤에서 숨어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남성 캐릭터의 주요 관심사는 돈과 같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인 반면, 정년에게는 꿈, 영서에게는 어머니에게 인정받는 것에서 자신을 찾는 것까지의 과정, 문 옥경에게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 선발과 같은 “다양하고 비물질적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성별에 따른 이항 대립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남성 인물: 방송국 PD, 국극단 건물을 사들이려는 사업부 부장;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관심(돈, 건물); 유려한 말솜씨, 두 얼굴; 음모, 배신의 서사
여성 인물: 예인(국극 배우, 영화배우, 가수); 다원화되고 비물질적인 것에 관심(꿈, 부모로부터의 인정, 후계자 선발, 예인으로서의 마땅한 태도 고수); 주체적이고 열정적; 성장, 우정, 사랑의 서사


남성 인물은 또한 여성 인물의 성장, 여성 서사의 전개를 위한 도구처럼 쓰이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윤정년 성장 서사의 시작은 그녀가 시장에서 소리를 하며 매란 국극단의 문옥경 눈에 드는 때이다. 이 시작의 배경 한구석에서 역시 악한 존재로 묘사되는 남성 캐릭터를 찾을 수 있다. 시장을 들쑤시며 돈을 걷으러 다니는 이 불량배를 보고 윤정년은 갑자기 소리를 시작하고, ‘소리를 들었으면 소릿값을 내라’며 남성 캐릭터(불량배)를 내쫓는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정년에게 어려운 계약서를 들이밀고 ‘테레비’가 원하는 여성상을 억지로 입히려던 방송국 피디 박종국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은 정년에게 한 번, 위자료를 내고 윤정년을 데려가는 단장 강소복에게 또 한 번,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패트리샤 김에게 그 자신도 모르게 한 번 망신당하고 무시당한다. 이처럼 <정년이>에는 남성 인물이 여성 인물의 성장을 돕거나 여성 인물의 강하고 단단한 성격을 보여주는 도구적 존재로 등장한다.


물론 여성 캐릭터 간에도 이항 대립을 통해 효과적으로 캐릭터성을 표현하고 있다. 주요 인물인 허영서, 윤정년, 문옥경, 서혜랑의 이항 대립은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허영서: 도시, 고급 저택 거주, 성악가 출신 어머니; 노력파 엘리트
윤정년: 목포 시골 출신, 생선 장사; 천재
문옥경: 대저택 거주; 매너리즘, 국극을 그만둘 생각.
서혜랑: 대저택 거주;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 없음.


허영서와 윤정년은 초반에 라이벌 관계로 묘사되다가 점점 깊은 우정을 쌓아가는 인물이다. 성악가 집안의 도도한 도시 여자인 영서는 노력파 엘리트로 항상 타고난 목소리를 가진 정년을 부러워하고 서로 자주 부딪힌다. 정년은 목포 시골에서 생선을 팔며 살아가던 인물로, 별천지에 사는 것만 같은 국극 배우의 무대를 보고 여성 국극의 왕자가 되는 것을 꿈꾼다. 둘은 초반 성장 배경부터 타고난 능력까지 이항 대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점차 서로가 좋은 자극제가 되어 멋진 배우로 성장해 간다. 문옥경과 서혜랑은 이미 성공한 국극 배우로 커다란 저택에서 함께 사는 인물이나, 국극을 대하는 태도, 후배, 후계자에 관한 관점이 상충한다. 옥경은 국극에 질릴 대로 질려 후계자를 뽑아 은퇴하려 하고, 혜랑은 반대로 자신의 현 위치를 절대로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존재이다.


이 점에서 혜랑은 후배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고, 국극단 건물을 위기에 처하도록 만들지만, 텍스트 전반에 자리 잡은 여성 중심적인 요소가 작동해 텍스트 속 모든 악한 느낌을 풍기는 여성 캐릭터에는 마땅한 이유를 부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혜랑의 경우 옥경이라는 인물과 미래를 함께하고 싶은 욕구, 삶에서 옥경과 국극이 차지하는 영역이 너무 넓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정이다. 옥경도 어찌 보면 갑자기 매란 국극단을 나가면서 국극단을 위태롭게 했다는 점에서 마치 악역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그녀가 오래도록 도전은 시도조차 안 하는 국극단에게 실망을 해왔다는 점 등을 반복적으로 표현해 악한 존재가 아닌 것으로 규정한다. 영서의 어머니인 한기주는 딸을 벼랑 끝까지 내몰아 성공에 목매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마저도 결국 극의 후반부에 아들을 하나 못 낳아 구박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딸들을 성공시키려 했다는 것을 대사로 표현하여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남성 인물은 이유를 부여하지 않은 ‘악함’을 표현하고 여성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시하며 정당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일레인 킴은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은 텍스트에서 새로운 이미지의 아시아인을 재현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텍스트 속 새로운 이미지의 제시는 전체 문화를 바꿀만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년이>도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재현으로 한국 드라마의 문화를 바꿨다고 볼 수 있을까? <정년이>의 주요 인물은 이전에는 없었던 충분히 입체적인 여성인가?


먼저, 극의 중반부에는 여성 참전 용사의 이야기를 담는다. 여성국극이라는 새 개념을 소개한 것을 넘어 여성도 참전하여 중요한 역사의 한 순간에 함께 했음을 자연스레 소개하고 있다. 이 점에서 여성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찾을 수 있으나, 나는 원작인 웹툰 <정년이>와는 다르게 드라마로 전환되면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정년의 언니 ‘정자’ 캐릭터에 주목했다. 원작에서는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않았던 정자는 누구보다도 정년의 꿈을 지지하고 응원하며 정년과 깊은 감정을 공유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재현되는 가족 중심주의를 바탕으로 우애가 깊은 언니 캐릭터를 강조한 것이다. 극의 초반과 정년이 목소리를 잃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후반부에서 정자는 국극 단장, 영서의 어머니와 같이 여러 사람과 관계 맺고 있는 중심인물인 정년의 엄마보다도 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듯 보인다. 정년의 가족에 아버지만 존재하지 않을 뿐 기존 한국 드라마의 가족 재현 방식을 비슷하게 구현하고 있다.


또한 시대적 배경 때문일 수도 있지만, 결혼으로 갑작스레 국극단을 떠나는 ‘주란’이나 영서의 언니 같은 경우도 새로운 여성상이라 보기에 어려운 감이 있다. 주연 격의 여성 캐릭터가 순종적이거나 가정적인 기존 여성상에 대비되게, 직업을 가진 당찬 캐릭터라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것에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비록 새로운 여성상은 아니더라도, 이들을 드라마가 표현하는 방식은 눈여겨 볼만하다. 앞에서도 언급한 우리 사회에 여전히 팽배한 여성을 향한 노골적인 시선, 섹슈얼리티의 강조를 드라마 <정년이>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드라마가 표현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오직 꿈을 위해 노력하고 아파하고 결국 이뤄내는 모습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해당 드라마가 완전히 새로운 인식의 전환, 문화의 변화를 이끌 순 없었지만, 한국 드라마계에 시사점을 주는 이유이다.


<정년이>가 보여주는 사랑의 다양성

최근 한국 드라마에서 ‘다양성’에 집중하는 경우가 잦다. 예를 들어 최근 OTT에서만 방영한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는 동성애자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고, 영화계에서도 트랜스 젠더인 주요 인물을 내세우거나 다양한 가족의 형태, 사랑의 형태를 보여주는 콘텐츠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정년이>도 직접적이진 않지만, 퀴어 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원래 원작인 웹툰 텍스트에서는 ‘부용이’라는 정년의 팬이면서 유명 극작가의 딸인 레즈비언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이 캐릭터를 완전히 삭제하는 대신 여러 캐릭터에 부용과의 에피소드를 분산시켰다. 특히 홍주란이라는 캐릭터는 부용의 요소를 가장 많이 부여받게 되며 자연스레 비중이 커졌고, 극의 후반부에는 정년을 보며 사랑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표현하거나 절절한 이별을 하기도 한다. 특히 이 두 인물이 몰입해서 무대 연습을 하는 장면 중 하나에는 로맨스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긴장감과 섹슈얼한 분위기로 주란과 정년이 서로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오래도록 다소 폐쇄적이었던 한국 대중 텍스트계의 새로운 바람에 <정년이>도 동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팬덤과 스타덤 - <정년이> 수용 방식 분석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해당 작품은 어떻게 21세기의 우리에게 와닿는 것일까? <정년이>는 1940년대 후반 처음 등장한 ‘여성국극’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생소하고 대중적이지 않은, 그것도 아주 오래전, 잠깐 등장했다 사라진 공연 예술을 다루는 드라마가 어떻게 이만큼의 몰입을 불러일으키는지는 드라마 속에 재현되는 극장 앞이나 국극단의 문 앞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치 K-Pop 아이돌과 그들의 팬처럼 작품 속 여성국극 배우와 관객은 스타덤과 팬덤을 구축하고 있다. 이들이 문화를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방식 또한 유사한데, 국극 배우의 포스터를 구하기 위해 열심인 소녀 팬들이나, 국극단 앞에서 편지나 꽃, 선물을 전하기 위해 무리 지어 있는 여학생 등이 그 예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플래카드와 같은 것을 만들어 공연 중에 들어 올리고, 멋있다며 소리치기도 하는 팬들의 모습은 현재 K-Pop 팬이나 배우의 팬들이 콘서트, 시사회 등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정년이>의 국극 배우와 팬의 관계는 팬덤과 스타덤의 강한 연결로 표현된다.


또 흥미로운 것은 대중이 드라마 <정년이>를 소비하는 방식 또한 팬덤 문화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는 것이다. 현실의 시청자들이 ‘윤정년’, ‘문옥경’과 같은 배우들의 극 중 이름, 캐릭터를 언급하며 장면 하나하나를 뜯어보고, 연기의 디테일을 마치 실존하는 인물의 말과 행동인 것처럼 여기고 열광하는 모습은 <정년이>가 극 내외에서 커다란 팬덤을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요즘 인기를 점점 더 얻고 있는 뮤지컬의 수용 방식과도 유사하게, 같은 작품에 대한 여러 배우의 연기와 노래의 차이점을 연구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페어, 즉 배우 조합 취향을 찾아 열광하고 팬이 되어가는 모습은 스타덤과 팬덤의 개념을 다룬 드라마가 그 자신의 팬덤을 구축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OTT 플랫폼 티빙에서는 이 팬덤의 구성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드라마 속 국극 장면만 따로 구성한 프로그램을 제작해 공연 예술을 간접 체험하게 했다.


<정년이>를 책임진 배우 스타덤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윤정년 역을 맡은 김태리라는 '스타'는 데뷔 때부터 믿고 보는 연기자라는 강력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녀는 성장 드라마라는 특성 때문인지 다소 극적이고 과장된 연기를 보일 때가 많았지만, 기존에 김태리 배우가 지니는 의미의 발현으로 그럴듯하게 대중에게 연기를 설득했다는 생각이다. 또 영화 ‘리틀 포레스트’부터 이어지는 문소리와의 모녀 관계도 기존에 한 번 보았던 익숙한 조합으로 빠르게 이들의 <정년이> 극 속 관계를 설정할 수 있게 하고, 문소리 또한 대중에게 오래도록 사랑받는 연기파 배우로서 텍스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특히 이 드라마는 배우들이 직접 소리를 해야 하는데, 이 작품을 보는 사람이 이들이 하는 소리가 좋은 소리라고 믿게 된 것에는 스타덤의 힘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느낀다. 특히 문소리, 즉 정년의 엄마가 목이 부러진 (소리를 잃은) 소리꾼이나, 똑같이 목을 다친 정년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함께 바닷가에 앉아 추월만정을 부르는 장면에서 만약 문소리가 아니었다면, 대중은 쇳소리 같은 추월만정을 이토록 감동적이고 인상 깊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역시나 아이돌을 캐스팅했다. ‘굴러들어 온 돌’ 정년을 시샘하고 질투하며 괴롭히다 결국 그녀의 실력을 인정하고 팬이자 좋은 친구가 되는 국극 단원 ‘박초록’ 역에 걸그룹 오마이걸의 승희가 캐스팅되었다. 국악을 배웠던 인지도 있는 아이돌을 캐스팅해 소리의 안정감을 주고, 관심도 챙겨가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승희는 원작에 비해 분량이 매우 늘어난 박초록 역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며 작품의 질을 함께 높였다. 현대의 아이돌 문화와 그 소비 방식과 크게 닮은 해당 작품에 아이돌을 주요 인물로 내세우는 것이 인상 깊다. 이렇듯 <정년이>에는 작품의 의도와 맞게 섹슈얼한 어필을 해왔던 배우보다는 연기로 인정받아 온, 안정적인 소리를 제공할 수 있는 배우를 활용해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을 가능한 최대로 입체적이고 서로 깊은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는 존재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이며, 또 나름 그 목표를 이뤄냈다고 평가한다. 여성 국극 배우, 여성 참전 용사, 큰 목소리를 내는 여성, 성공하고 싶은 여성, 남자의 사랑 따윈 관심사가 아닌 여성과 같이 우리 대중 텍스트에서 오래도록 잊힌 여성들을 투박하고 노골적이게나마 소개한 2024년 하반기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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