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모금: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지만, 필름 속에 빛으로 기억될 거라고.
우리가 촉각이라 부르는 것에는 사실 맞닿음이란 실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원자끼리 그만큼이나 가까워져 전자기력으로 서로 밀어내는 상태에 도달했을 때의 그 변화된 느낌을, 우리가 만지는 감각, 즉 촉각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맞닿아 있는 것 사이엔 아이러니하게도 공간이 존재한다.
문장 또한 그렇다.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글을 이루지만, 문장 사이, 단어 사이, 형태소 사이에도 반드시 어떤 여지가 있다. 그곳은 글쓴이가 의도적으로 설계하거나 텍스트끼리의 은밀한 합의로 생겨나, 독자가 나름대로 해석하는 공간이다. 단편은 그 점에서 아름답다.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이 많지 않아도 단편은 그사이에 공간을 낸다.
공상과학 장르는 단편과는 거리가 멀 것으로 보인다. 세상에 없는 것을 믿게 하려면 사이 공간을 좁혀 눈앞에 세계를 상세히 펼쳐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사실을 직시하는 가정문을 제목으로 하는 어느 한 젊은 작가의 단편 모음집이 있다.
공상과학 단편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냐는 편견 바로 앞에 김초엽 작가의 분홍색 우주선이 착륙한다. 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외계인이 '음, 어쩌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미래 사회를 그려냈지만, 지금의 우리가 생각해 볼 질문들을 사이사이에 띄워 놓았다.
I 두 번째 단편, <스펙트럼>
우리는 어째서 오늘 마주한 당신이 어제의 당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굳게 믿게 되는 걸까. 기존의 시각 정보와 당신의 외모가 일치하기 때문에? 같은 목소리에, 당신이 할 법한 말을 건네기 때문에? '당신이 할 법한 말'이라는 건 어떤 기준으로 형성되는 것일까.
<스펙트럼>은 최초로 외계 생명체와 조우한 여성 우주인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주인 희진은 사고로 외계 생명체가 사는 곳에 떨어져 '루이'라는 개체를 만난다. 독특한 외형에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루이와 무리인은 (희진이 조우한 외계 생명체 무리를 칭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나름의 문화를 형성해 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개념이 있다.
무리인들은 수명이 길어야 5년밖에 되지 않는다. 희진은 '첫 번째 루이'의 죽음을 목격한다. 며칠 뒤 새로 나타난 개체를 다른 무리인들이 '루이'라 부른다. 그들은 한 무리인의 자아가 다른 무리인의 몸으로 이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그리고 어떻게 두 번째 루이가 첫 번째 루이와 같은 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희진이 자아가 전달되는 방식을 알게 된 것은 '네 번째 루이'가 이전의 루이들이 그려놓은 그림을 살피기 시작했을 때이다. 희진은 알아볼 수 없는 색채의 향연. 그들의 유산과도 같은 그림을 네 번째 루이가 모두 살펴보았을 때, 희진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그들은 다른 루이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같은 루이가 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도 작용하지 않는다. 루이들은 단지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들은 기록된 루이로서의 자의식과 루이로서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경험, 감정, 가치, 희진과의 관계까지도.
그렇다면 희진도 그들을 같은 영혼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전의 당신과 정확히 같은 경험, 감정, 가치, 관계를 공유하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당신이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인지. 그렇다면 자아라는 것은 기억에서 기원하는 것인가 보다. 분절된 개체에 자아를 매개로 연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상상. 전생과 환생 같은 것과는 다르게 고차원의 기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자아의 전이. 이것이 가능하다면 내가 떠나보낸 이들을 다시 보거나, 나를 떠나보낸 이들이 나를 다시 찾을 수도 있을 텐데. 이러한 생각이 들 때쯤, 사실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을 떠올린다.
그런 게 중요한 거였다면, 희진은 지구에 돌아와 기억의 전이를 연구를 위해 당장 수백 명의 과학자와 함께 행성으로 우주선을 끌고 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가 된 희진은 그 행성의 위치에 대해 어떠한 단서도 내놓지 않았고, 홀로 색채 언어를 연구할 뿐이었다. 희진과 루이는 서로의 언어도, 사고방식도 무엇 하나 제대로 이해해 낸 것이 없지만, 하나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설명할 순 없어도 루이들은 희진을, 희진은 루이들을 아껴 왔다는 사실. 위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당신이 당신임을 알 수 있는지 생각하는 일은 중요치 않게 된다.
지구에 돌아온 이후로 할머니는 여생을 색채 언어의 해석에만 몰두했다. 내용의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시간을 들여 가며 알아낼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평범한 관찰 기록이었다. 그러나 그중 잊히지 않는 한 문장만큼은 지금도 떠오른다.
"이렇게 쓰여 있구나."
할머니는 그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누군가와 '함께했던 기억'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고, 서로를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 그 과정의 전부일지 모른다. 자연의 분절성 속에서도, 상상 속 연속성에 대해서도 남는 건 서로를 영원히 놀라워하고 아름다워하는 일뿐이다.
나는 또 다른 아침을 맞았다. 당신이 내 눈앞에 있다. 나는 내 앞의 당신이 여전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당신도 그렇다. 나는 당신을 위한다. 당신도 나를 위한다. 무엇으로 당신이 당신임을 알 수 있는가?
I 세 번째 단편, <공생 가설>
"류드밀라 마르코프에게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에 관한 기억이 있었다."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걸 '아네모이아'라고 부른다고 한다. 내게는 80년대가 그렇다. 80년대 한국 가요를 들을 때면, 내가 없었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느낄 때가 있다. 나는 그때 존재하지 않았지만, 마치 내가 그 시간과 함께였던 것처럼.
<공생 가설>에서는 자신이 가본 적 없는 '그곳'에 관한 향수를 느끼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류드밀라는 '그곳'을 떠올리며 공상에 빠지거나 마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히 '그곳'을 그려낸다. 이름이 없는 행성. 사람들은 그녀의 그림에 매료된다. 마치 그들이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어떻게 류드밀라는 모든 인간이 향수를 느낄만한 상상의 공간을 이리도 세밀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공생 가설은 류드밀라의 행성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니,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우주망원경이 보낸 데이터가 류드밀라의 행성과 정확히 일치하면서부터.
류드밀라에게는 미래를, 아니면 아주 까마득히 먼 과거를 보는 초능력이 있었을까? 하지만 그런 능력이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은 단지 엄청난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 어떤 예술가가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행성의 모든 특성이, 정말로 우주 어딘가에 존재했던 행성과 완벽하게 들어맞을 가능성이 존재할까?
한편, '뇌의 해석 연구소'에서는 신생아의 울음에서 의미가 있는 문장들을 수집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아이들의 울음은 각각 이런 의미를 가졌다.
⌈어떻게 하면 더 윤리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다들 거기에 잘 계신가요?⌋
⌈아냐,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곳은 여기야.⌋
아이들의 울음에서 믿을 수 없는 데이터가 도출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데이터를 다시 모으고 분석해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 복잡하고 심오하고 철학적인 아기들. 이때 천문대와 뇌의 해석 연구소 데이터의 교집합이 발생한다.
⌈우리의 행성이 보고 싶어⌋
⌈류드밀라⌋
⌈류드밀라⌋
⌈류드밀라⌋
⌈류드밀라는 그곳을 그대로 그려냈는데⌋
아이들의 머릿속에만 있는 '그들'은 류드밀라의 행성에서 온 존재로, 어떤 이유에선지 아주 어린아이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공생 가설. 수만 년 전부터 인류와 공생해 온 어떤 이질적인 존재가 있다.
하나. '그들'은 인간에게 '인간성'을 부여해 왔다.
상자 속의 아이들 실험. 외부와의 접촉 없이 보육 로봇에게서 길러진 아이들에겐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이타성과 같은 윤리성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인간이 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인간성이라 불렀던 것이 외계성일 수 있다는 가설.
둘. 일곱 살을 전후로 '그들'은 반드시 떠난다.
유년기 기억 상실. 일곱 살을 기점으로 아이들은 기억의 대부분을 잃는다. 그들이 기억과 함께 떠났기 때문이라면? 그들의 세계를 완벽히 구현하는 류드밀라에게만 오래도록 머물렀던 거라면? '나를 떠나지 말아요'라는 제목의 그녀의 연작도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사람들이 그녀의 그림에 알 수 없는 향수를 느낀 것도.
아네모이아가 어쩌면 외계에서 비롯했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상상. 나의 편리 공생자는 어디로 갔을까?
I 네 번째 단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주를 여행하고 싶나요?"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을 좋아한다. 내 대답은 예스다. 우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우주는 신비한 공간이라는 사실뿐이지만 말이다. 우주를 미지의 세계라고 하지 않는가. 잘 알지 못하는 세계, 설명할 수 없는 공간. 원래 가치 있는 것들엔 하나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사랑은 어디서 시작되는지,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 아끼는 마음… 그 '마음'이라는 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마음이라 하면 가슴에 손을 얹게 되는데, 머리를 짚는 게 더 말이 되려나. 이렇게 미지의 것들은 알지 못해서 갖고 싶고, 따라서 소중하다.
우주는 말랑해서 우주의 다른 쪽과 만날 수가 있다. 어릴 때 내 친구들은 트램펄린이 있는 놀이방에서 노는 걸 좋아했다. 우린 그걸 방방이라고 불렀는데, 어느 날 우리 집보다도 큰 것만 같은 방방에 올라갈 때면 몸이 푹 꺼지는 느낌이 들어서 내가 바닥에 닿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곤 했다. 우주에선 그렇게 늘어난 방방은 바닥이 아닌 다른 구멍과 연결되어, 다른 세계로 우리를 보내 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생겨난 통로를 웜홀이라 한다. 어린 내가 웜홀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방방을 더 무서워했을 텐데.
인간이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먼 미래가 찾아오면, 웜홀을 통과해 다른 행성에 가 살아 볼 수도 있겠다. 안나는 여성 과학자이다. 그녀의 가족은 그렇게 먼 우주의 어느 행성에 살고 있다. 그러나 웜홀을 열어두는 데에는 많은 에너지가 들고, 더 이상 열어둘 필요가 없다면 언제든 닫힐 수 있다. 안나는 그렇게 가족과 이별했다. 먼 우주에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다시 만날 길이 없다. 따라서 안나는 냉동 수면 기술로 자신을 얼려두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먼 우주로 갈 수 있을 때만을 기다려왔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우주를 여행하고 싶나요?"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우주가 말하는 이별이 이런 것이라면,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가는 것뿐이라면, 내 대답이 영원히 예스일 수 있을까. 안나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했다. 이미 사랑하는 가족은 그곳에 없겠지만, 그 옆에 묻힐 수라도 있다면… 인간이 우주적 한계를 극복해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 미지의 우주 속 인간은 여전히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모르는 마음에 의해 더욱 고독해질지도 모른다. 인간은 우주의 냉정함을 견디기에 아직 유약하다.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어서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스마트폰의 시작이 전화기라지만, 카메라를 달고 있는 이유도 거기서 온 게 아닐지.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을 향해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를 빛으로 남겨 기억하면 되니까.
"어쩌면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촉각이라는 아름다운 착각으로 살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이 매거진을 함께 펴내는 작가님께서 이런 말을 해주셨다. 김초엽 작가 또한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우리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게 되겠지만, 그렇게 먼 미래에도 누군가는 외롭고 고독하며 닿기를 갈망할 것이다. 어디서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서로를 이해하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싶다.
잊지 말자. 결국에 인간에게 남는 건 서로에 대한 소중한 기억과 아름다운 착각이라는 것을.
김초엽 작가의 에일리언은 사랑과 죽음, 삶이 그런 것이라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