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모금: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눈 위를 덮은 서리를 뚫고도 자라나는 생명에게
파르마콘(Pharmakon). 치료제이면서 독이 될 수 있는 것. 플라톤에게 글의 탄생은 파르마콘이었다. 글자가 생겨나면서 인간은 지식을 축적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많은 것을 글로써 적어 왔다. 하지만, 글이 정말 지식과 기억의 방을 넓혔는가. 우리는 그 질문에 쉽사리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글이라는 대안이 탄생하며 우리는 무언가를 절실히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다. 사진을 찍다 풍경을 눈으로 담는 일은 뒷전으로 두는 여행객들처럼 말이다.
한편, 나는 글과 작가 사이의 파르마콘을 발견한다. 0으로부터의 상상은 불가능하다. 필연적으로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글에 자신의 삶을 투영한다. 작가가 글을 쓰기로 결심하게 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 방에서, 나는 우스갯소리처럼 이런 말을 했다. 좋은 글은 행운처럼 찾아오기보다는 불행에서 자라난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사이로 다른 생각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어쩌면 글을 써서 불행한 건 아닐까?
글은 그 자체로 작가에게 치료제이자 독이다. 자신의 불행을 적어 절실히 기억해 낼 필요가 없어지면서도, 글을 쓰기 위해 고뇌하는 시간은 또 다른 불행으로 남는다. 작가는 누구보다도 외롭고 불행하다. 격변의 한국 근대사를 떠올려 보자. 온갖 외세의 침입으로 국운이 기울고, 일제 하에 민족의 정체성마저 잃어야 했던 시기. 시대의 불행은 개인의 불행이 되고, 얼음 위에 눈 내리듯 이번엔 오롯이 한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불행 또한 나린다. 그렇게 1926년, 작가 박경리는 태어났다.
박경리 작가의 작품을 논하려면, 그녀 개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김약국의 딸들>은 그녀의 고향인 통영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박경리의 리얼리즘은 차원을 달리한다. 세밀하고 사실적인 문체 위 방대한 인물사와 인물 간의 다양한 관계성으로 독자가 책 속에 생생히 자리하는 듯하다. 사투리가 귓가에 낭낭하게 들려오고, 가본 적 없는 통영 바닥이 눈앞에 훤히 펼쳐지고, 은은한 바다 내음마저 흘러들어 온다.
마지막으로 동헌 뒤켠으로 빠지는 북문, 이것만이 유일한 육로다. 섬의 신세를 면한 길목이다. 토성골을 지나 붉은 황톳길인 장대고개를 넘어서 가을이면 통영의 지주들이 당나귀를 타고 고성으로, 사천으로 추수를 거두어 가고, 봄이면 춘궁을 모면키 위하여 어촌의 아낙들이 마른 생선과 해초를 포대에다 꾸려서 이고 곡식 도붓길을 떠나는 슬픈 고개다.
3.1 운동 이후 항일운동이 한창이던 1926년 12월, 그녀는 경상남도 충무시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광복을 맞은 1945년은 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였고, 스무 살이 되던 해 결혼하고 이후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낳았다.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그녀의 남편이 공산주의자 혐의로 잡혀갔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몇 년 안 되어, 국민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아들이 사고로 죽는다. 이렇게 시대의 상처 위에 소금 뿌리듯, 작가 개인의 슬픔은 까슬히 내려앉았다. 작가 박경리가 글에 몰두하기로 결심한 계기였다. 그녀는 문학의 밤 행사에서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삶이 평탄했더라면 나는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삶이 불행하고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1962년, 장편 소설 <김약국의 딸들>이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끈다. 그녀는 대하소설 <토지>를 25년간 집필하였으며, 토지 집필 시기인 1973년, 그녀의 딸이 저항 시인 김지하와 결혼한다. 하지만 사위인 김지하가 사형선고를 받게 되고, 시댁에 외로이 남겨졌을 딸을 위해 원주로 거처를 옮긴다. 2007년 폐암을 발견하고 5월 5일 사망하였다. 작가 개인의 삶과 시대를 살펴보는 것으로, 우리는 그녀의 여러 작품에서 외롭고 괴로웠던 한 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비상 묵은 자, 자손은 지르지 않는다 카던데……." 김약국의 어머니 숙정은 비상을 먹고 죽었다. 비상을 먹고 죽은 사람에게 자손이 남지 않는다는 말이 김약국을 평생 짓누른다. 인주를 가득 먹인 도장의 흔적처럼, 진하고 빨갛게…… 그걸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으려나. 운명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의 뜻이라지만, 운명을 달리하면 그건 죽음이 아닌가. 그래선지 그의 운명은 그에게도, 아내와 그의 어린 아들과 다섯 딸에게도 저주처럼 남는다.
부모가 죽고, 큰아버지인 김봉제가 그를 거두지만, 그마저 죽는다. 결혼하고 얻은 첫 아이가 병으로 죽고, 그 후로 다섯 딸을 낳아 살지만, 그의 아내와 딸들의 삶 또한 그의 삶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의 곁엔 언제나 다른 이의 죽음이 있고, 그들의 죽음이 있다.
저의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셨어요. 할머니는 자살을 하고 할아버지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어디서 돌아갔는지 아무도 몰라요. 아버지는 딸을 다섯 두셨어요. 큰딸은 과부, 그리고 영아 살해 혐의로 경찰서까지 다녀왔어요. 저는 노처녀구요. 다음 동생이 발광했어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죠. 그것은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부터가 반대했으니까요. 그는 처녀가 아니라는 험 때문에 아편쟁이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어요. 결국 그 아편쟁이 남편은 어머니와 그 머슴을 도끼로 찍었습니다. 그 가엾은 동생은 미치광이가 됐죠. 다음 동생이 이번에 죽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그 편지를 받았습니다.
운명과 죽음이 궤를 같이한다는 것은 김약국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모두 죽음이라는 정해진 운명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용빈은 인간의 운명이 다 다르다고 생각하나?"
"다르겠지요."
"다르다는 것은 운명이 아니야. 나는 내 직업상 수없는 인간의 죽음을 보았어. 인간의 운명은 그 죽음이다. 늦거나 빠르거나 인간은 그 공동운명체 속에 있다. 죽음을 바라보는 꼭 같은 눈동자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말자."
그렇다면 죽음을 제한 인간의 삶은 운명이 아닌 개인의 능력인가, 둘째 딸 용빈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면 저의 능력 때문에 저는 이런 현실 속에 서 있는가요?"
"상황이 다르다 뿐이지 사람은 대부분 자기가 눈을 감을 동안 여러 사람의 죽음을 체험한다. 지금 용빈의 현실은 그 죽음에서 온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것뿐일까요."
"다른 일까지 운명으로 밀어버린다면 우리는 못 살 거 아닌가."
정윤은 웃었다.
"아아, 참 전망이 좋네요. 바다보다 불안하지 않군요."
인간은 태어나며 비상을 먹고 우리 모두가 아는 끝을 향해 삶이라는 끈을 잡고 옴싹옴싹 움직이는 존재다.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죽음에서 비롯하고, 그것으로 달라지고,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그것으로 누군가의 삶은 변모한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가 보다.
우리의 운명을 마주하는 일은 간단하다. 수용하고, 행동하는 것. 어둠이 있기에 밝음이 있고, 악한 자들이 있기에 선한 자를 사랑하듯, 죽음이라는 우리의 공동 운명은 우리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든다. 김약국의 다섯 딸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아버지에게 내려진 저주 같은 말은 그의 다섯 딸의 비극적인 삶으로 이어진다. 통영에서는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거나 절망적인 일들. 그러나 김약국집은 고개 숙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 또한 이들 삶의 비참함을 호소하기보다는 아주 담담하고 관찰적인 시각에서 쓰였다. 그들의 비극을 통해 독자는 먼발치에서 '그럼에도 지속해야 할 우리의 삶'에 대해 고찰할 수 있다.
다섯 딸, 용숙, 용빈, 용란, 용옥, 용혜는 능동적인 인물들이다. 살해 혐의를 받아도, 마음을 나눈 사내에게 버림받아도, 가정폭력을 당해도, 시아버지에게 겁탈을 당해도, 세상과 첫인사를 건네면서부터 가족의 비극을 마주하더라도 자신을 위해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은 인물들이다. 박경리 작가는 생명이 아름다운 이유가 능동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인간을 피동적이게 하는 것들, 대량살상무기나 전쟁 같은 것들, 이들의 영원함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그녀의 생명 사상을 이 초기 장편에서도 느낄 수가 있다. 격변하는 시대 속 겹겹이 쌓이는 비극을 보란 듯 뚫고 나오는 강인한 인물들의 생명력을.
박경리에게 글은 위안이었을까, 고통이었을까. 이것만은 확실하다. 작가 자신도 그녀 작품 속 인물처럼 공동 운명을 마주하는 강인한 인간이었다는 것.
많은 현대인이 쉽게 삶을 비관한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로 하나의 선택지가 된 것만 같은 자살이 이 사회에 팽배해진 것도 이 비관에서 비롯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라도 어느 생명의 죽음을 지켜본 적 있다면, 삶의 아름다움을 외면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고통이 죽음보다는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윤선은 출항을 고한다. 멀어져 가는 얼굴들, 가스등, 고함 소리.
통영 항구에 장막은 천천히 내려진다.
갑판 난간에 달맞이꽃처럼 하얀 용혜의 얼굴이 있고, 물기 찬 공기 속에 용빈의 소리 없는 통곡이 있었다.
봄은 멀지 않았는데, 바람은 살을 에일 듯 차다.
바람이 살을 엘 듯 찬 우리의 삶은 그 통각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글을 쓴다. 작가는 누구보다도 삶의 고귀함을 잘 아는 자들이기에. 통영의 바다처럼 지치지 않고 철썩철썩 뺨을 쳐대는 불행들에도 인간의 숙명을 알고, 따라서 우리의 마지막을 이해하기에. 생명이란 아름다운 것. 강인한 그들은 이를 좇는 방법으로 펜을 들기로 하였음을.
나는 불행했기 때문에.
그러나 삶은 찬란하기에.
그래서 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