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17 Sat
어떤 말로 지난 6개월을 마무리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이 글을 적는 데 일주일 정도가 걸린 것 같다. 치열하고 바쁜 학기를 보냈을 많은 주변 사람들을 두고 추운 1월의 겨울, 한국을 떠나왔다. ‘부럽다, 재밌겠다.’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괴로운 현실을 들키는 게 두려워, 애써 즐거운 척을 했다. 그간 나는 사실 무척 힘들었다. 낭만과 여유를 위해 도피하듯 떠나온 마드리드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그토록 어렵게 번 돈과 젊은 귀한 시간을 투자할 만한 조금의 가치도 이 곳에서 찾지 못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불속에서의 며칠을 보내기도 하고, 지나가는 행인의 시선과 관심이 아프기도 했다. 남들은 잘만 지내는 것 같은데 나는 하나도 쉬운 게 없을까, 한탄했다.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첫 외국 생활, 첫 독립, 첫, 첫, 죄다 처음뿐이라 힘들고 어려운 게 당연했다. 나는 뭣하러 여기까지 와서 고생 고생하며 그리운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말 안 통하는 무서운 외국인들 사이에서 온갖 차별과 희롱을 겪어야 할까, 왜 나는 사서 괴로울까, 했다. 그런데 참 근본 없는 의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인생에서 처음이 아닌 게 몇 개나 되겠는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지금은 죽고 못 사는 친구들과도 처음 만나는 순간이 존재했고, 처음 학교에 들어가고, 처음 졸업하고, 처음 시험을 보고, 처음 취직을 하게 될 텐데, 그래서 서투르고 어려운 것이 당연한 데 나는 그 당연한 순리를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스스로 얼마나 갉아먹고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구태여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순간을 왜 이리 어렵게 넘어갔을까 싶었다.
출국하던 날 엄마가 보낸 문자가 생각났다..
[�] [오전 9:09] 예원아
[�] [오전 9:10] 처음엔 많이 힘들고 외롭고 무서울거야
[�] [오전 9:12] 조금만 더 참고 조금만 더 견디면
[�] [오전 9:13] 분명 잘해내고 있는 모습이 보일거야
[�] [오전 9:14] 그럼 그때가서 한번크게 울고 털어버리고 큰숨한번 몰아쉬고
[�] [오전 9:15] 급하지않게 유유자적
[�] [오전 9:15] 여행을시작하면되니까
[�] [오전 9:16] 지금은 울지말고 똑순이로 야무지게
[�] [오전 9:16] 알지?
[�] [오전 9:17] 돈걱정,집걱정,하지말고
[�] [오전 9:17] 언제나 그렇듯
[�] [오전 9:17] 또다시 물은 흐르니까
[�] [오전 9:18] 언제나 24시간
[�] [오전 9:18] 아무때나 열려있는거알지?
[�] [오전 9:20] 가자마자 하루는 푹쉬고 천천히 해도되니까
[�] [오전 9:20] 걱정마
[�] [오전 9:20] 건강하자
[�] [오전 9:20] 무조건 건강하게
[�] [오전 9:21] 많이보고 느끼고 즐기고와
[�] [오전 9:21] 사랑한다
[�] [오전 9:21] 내딸
엄마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걸 여행의 끝에서 발견했다. 엄마 말처럼 많이 힘들고 외로웠고 무서웠고, 그런데 조금만 더 참고 조금만 더 견디니 잘 해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제야 울며 털어버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건강하게만 보고 느끼고 즐기고 오라던 엄마의 말처럼 나는 잘 보고 잘 느끼고 잘 즐겼다.
대단히 커있을 것만 같은 여름의 나는 사실 여전히 어리고 치사하고 이기적이고 신경질적인 못난 나를 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언컨대 이 시간이 나의 청춘을 채우는 좋은 밑거름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온몸으로 홀로 부딪혔고, 싸웠고, 견뎠고, 참았다. 잊고 살았던 소중함도 간절하게 되살아났고, 영원할 것 같던 걱정과 불안도 지나갔다. 부족한 나도 결국 나라는 것을 조금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고, 인생의 고민은 필연적인 것이며 누구에게나 그릇에 맞게 주어진다는 것도 실감했다.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이런 글을 쓰고 있어도, 머지않아 또 다른 사소하고 어리석은 고민으로 나 자신을 괴롭히고 있을 게 뻔하다는 것도 안다.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과도 또 입 아픈 씨름과 자존심 싸움을 해대고 있을 것도 안다. 고작 20대 초반이라는 것을 안다.
소중한 인연을 만들었고, 버려야 할 인연을 아프지만 잘 정리했으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취직과 학점이 아니라 내 행복이라는 가치관을 굳혔다. 인간관계에 보다 간단해졌고, 불안함과 위태로움은 20대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이제 어떤 어려움도 겪어내면 지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편견과 차별로부터 조금 가벼워졌다. 안 좋은 일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털어내기로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충분히 사랑하고 표현하리라. 기꺼이 받아들이고 보내주리라. 기꺼이 기뻐하고 슬퍼하리라. 기꺼이 웃고 울리라. 내숭과 가식으로 아름다운 나의 민낯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리라.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자유로워지리라. 나는 오늘도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