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화 Feb 27. 2018

김태리가 너무 예뻐서 요리 뽐뿌 오는 영화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김태리 주연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있으면, 예전의 지오다노 광고가 생각난다. 기본 면바지에 티셔츠, 체크남방을 툭 걸쳤을 뿐인데 앵글에 잡히는 장면마다 김태리가 ‘너무’ 예뻐 보인다. 머리를 길러서 흑발로 저렇게 파마를 해볼까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김태리 사진을 보여주는 순간, 미용사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짐작이 간다. ‘손님,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에요.’ 김태리는 예뻐보이는 게 아니라 예쁘다. 특히 따뜻하고 밝은 곳에서 빛나는 사람이다. 영화 <아가씨>의 어둡고 퇴폐적인 조명 아래서는 볼 수 없었던 김태리의 건강한 아름다움을 이 영화에서는 만나볼 수 있다. 


저 파란색 상의 어디서 파는지 아시는 분은 댓글 좀...


원래 예쁜 그녀가 유독 더 예뻐보이는 까닭은 이 영화에서 웃는 장면이 많기 때문이다. 김태리가 연기한 혜원은 대학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다 지쳐서 살던 시골로 내려온다. 도시에서의 그녀는 다크써클이 가득한, 지친 얼굴이다. 혜원은 고향집에서 손수 기른 것들로 정성스레 밥을 지어먹으며 기운을 회복한다. 인스턴트 도시락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갈증들이 해소되는 순간마다 그녀는 미소 짓는다. 그래서 파스타를 말면서도 웃고, 지붕을 고치다가도 웃고, 자전거를 타면서도 방실방실 웃는다. 동네 친구들하고도 만나서도 연신 웃음꽃을 피운다. 


꽃파스타보다 김태리가 더 예쁜 게 말이 되냐 


그런데 그 웃음이 너무 친절하고 아름다워서 도무지 시골사람의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시골 살아봐서 아는데, 촌년들은 그렇게 실없이 웃지 않는다.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경험상으로는 그렇다. 내 얼굴에 팔자주름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서울에 온 이후의 일이다. 늘상 그 사람이 그 사람인 동네에 살다가,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이 200명이 넘는 서울에 살다보니 필요에 의해서 웃게 되었다. 한 사람과 깊이 관계 맺을 시간이 부족한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좀 더 자주 웃어보일 필요가 있다. 김태리의 웃음은 내가 서울에서 익힌 웃음하고 비슷해보였다. 자기가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앵글 너머 타인에게 아름답게 비쳐지기 위한 웃음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좀 더 연기가 자연스러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런 점에서 류준열의 무덤덤한 톤이 이 영화의 질감에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류준열네 아버지 과수원하셨던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이 영화의 원작인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을 보면 이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여주인공 하시모토 아이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내면의 만족감을 표현하는 것도 음식 한 젓갈 먹고 하늘을 쳐다보는 걸로 족하다. 일본판의 여백과 한국판의 명확한 웃음, 이 표정의 차이는 두 영화를 구분 짓는 상징적인 요소다. 사계절을 두 영화에 나눠 담았던 일본판과는 달리 한국판은 한 영화 안에 다 담은 탓에 러닝타임이 짧다 보니 호흡이 짧아졌다. 미묘한 표정 변화와 유유자적한 풍경을 담아, 여백으로 관객에게 해석을 맡기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같은 장면,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 
다른 느낌.(일본판 <리틀 포레스트>)  


그래서 한국판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행동의 이유와 동기를 자기 입으로 뚜렷하게 설명한다. 캐릭터가 뚜렷해졌고, 인물과 인물 사이에 얽힌 서사도 명징해졌다. 그러다보니 생활의 맛이 유실됐다. 시골에 혼자 살면서 스스로 농사짓고 밥 해먹고 계절을 느끼는 일과 그 자체는 별 얘깃거리가 없다. 그 얘깃거리 없음, 고요함, 슴슴함이 순환을 느끼며 살아가는 게 일본판의 포인트인데, 한국판에서는 확실히 덜하다. 그 자리를 달달함과 소란스러움이 차지한다. 그래서 전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청춘드라마에 가까워보인다. 

 

어쨌든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완전히 소진될 수 없다. 이 영화를 보면서 뿌리내린 사람들이 새삼부러워졌다. 서울생활 13년째, 지금도 가끔 나는 내가 살던 곳의 노목을 찾는다. 재개발로 논이고 밭이고 동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400년 된 은행나무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할 때 받는 위안이 있다. 그게 고향집이라면, 그리고 그 공간에서만큼은 스스로를 먹여살릴 수 있다면 어떤 막다른 골목에 몰렸더라도 살아갈 힘을 회복할 수 있을 테다. 


나는 이미 뿌리가 뽑혔으니 어디서든 살아남겠다는 각오로, 더 가열차게 요리하련다. 담벼락에 마구잡이로 무성하게 자라던 호박잎파리를 막 따서 쪄먹던 맛이며, 친구네 하우스에서 방금 따온 노각을 고추장에 싹싹 비벼먹던 맛만큼은 못하겠지만. 김태리가 요리하는 모습이 예쁘니까 나도 앞으로 더 열심히 요리할 거야…. 


흑발하고 파마해볼까, 역시 고민이다.        


저 목도리는 어딘가에서 팔겠지?


 

#리틀포레스트 #김태리 #브런치무비패스



작가의 이전글 더 잘 피흘리기 위해, 내 몸을 더 사랑하기 위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