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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Dec 31. 2020

고독한 천재에게 필요했던 단 한 가지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 리뷰 - 누구에게나 동료는 필요하다  

넷플릭스 <퀸스갬빗>_미국의 엘리자베스 하먼이 소련의 체스 챔피언 보르고프와 시합을 벌이는 장면  


"조심해. 공산주의 놈들은 떼로 싸워. 팀을 이룬다고. 미국 놈들은 혼자 싸우지. 도움받는 걸 싫어해. 그게 문제야." 


이번주 내내 기능적으로는 훌륭한데, 알콜중독에 빠진 여자가 주인공인 작품을 봤다. 하나는 에세이 <명랑한 은둔자>이고, 또 하나는 넷플릭스 시리즈 <퀸스갬빗>이다. 이것들을 보느라 나도 5일 내내 술을 달고 살았다. 취한 채로 취한 여자들이 잔뜩 나오는 작품을 봤다. 판타스틱한 경험이었다. 스크린을 넘어 그들과 친구가 함께 술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흡연 씬도 어찌나 많이 나오는지, 담배 피우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여튼  <명랑한 은둔자>의 캐럴라인 냅이든 <퀸스갬빗>의 엘리자베스 하먼이든 그들이 술에 의지하는 이유는 하나다. 자신의 부족함을 잊고, 긴장을 풀기 위해서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결점을 드러내지 않으려 팽팽하게 긴장한 상태로 지낸다. 살아남기 위해 지금까지 해온 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베스가 체스에 빠진 이유는 최선을 다했을 때 보답이 돌아오는, 예측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역챔피언 전에서 우승을 하고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보드는 단 64칸으로 이뤄진 하나의 세상이잖아요.  그 안에선 안전한 느낌이에요. 내가 주도하고 통제할 수 있으니까. 예측 가능하고요.  다치더라도 제 탓인 거죠. "


주인공인 베스는 자신만만해보이지만 실은 위태로운 캐릭터다. 그 안에는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 어려서부터 베스가 마주한 세상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아버지는 거절했고, 양아버지 역시 양어머니를 두고 떠났다. 그래서 베스는 어려서부터 자립해야 한다고 배웠다. 세상에 마치 자기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쓰러지면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생존을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베스의 숙적, 소련의 최강자이자 세계 챔피언 보르고프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저 애는 고아야. 생존자지. 우리(소련)와 같아. 지는 건 선택지에 없지.*  안 그러면 삶이 어떻겠어? "



여기서 말하는 '고아'는 베스에게 부모가 없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만큼 뒷배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누울 자리 보고 뻗는다고, 실패했을 때 돌아갈 곳이 없다면 배수의 진을 치고 독기를 품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베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은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함께 지낸 졸린이 돌아온 순간부터다. 졸린은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대신 필요한 것들을 필요한 순간에 내어줄 뿐이다. 베스는 말한다. "넌 나의 수호천사야." 졸린은 엿먹으라며 이렇게 덧붙인다. 


"한때 난 네 전부였어. 그리고 한때 넌 내 전부였고. 우린 고아가 아니었어. 서로가 있었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 난 네 수호천사도 아니고 널 구해주러 온 것도 아니야.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 너한테 내가 필요하니까 여기 있는 거야. 그게 가족이야. 그게 우리고. 언젠가 나도 네가 필요하겠지.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또 모르잖아. 그때가 되면 너도 와줄 거잖아?" 


단짝 졸린과 베스. 


돌이켜보면 베스가 정말 혼자였던 적은 없었다. 소련에서 열린 체스 시합에서, 상대방 선수들이 밤마다 함께 모여 시합을 복기하고 전략을 짜고 있는 장면을 발견했을 때, 그는 그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소련 놈들은 떼로 싸우고, 미국 놈들은 혼자 싸우느라 망한다는 말을. 


결정전을 앞두고 긴장감을 떨치기 위해 술에 의지하기 직전인 그때, 미국에 있던 친구들의 전화가 걸려온다. 다들 베스가 시합에서 쳐바른 놈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조언이 실질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베스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고마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줘서.' 


샤이벌 씨로부터 지는 법을, 졸린으로부터 도움받는 법을,  (타운스 기타 등등 한참 하수인) 친구 놈들로부터 응원받는 법을 배운 베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본인이 지닌 최대치의 힘을 발휘한다. 


드라마에서는 베스의 승리로 끝나지만, 그것이 결코 미국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 미국은, 아니 자본주의는 혼자서만 잘하려고 하기 때문에 진다. 넘어진 사람을 돌보는 게 아니라 "전우의 시체를 넘고 앞으로앞으로"(갑자기 이 노래가 왜 생각나지? 파주에 접경지역에 살았던 덕에 고무줄 노래로 이런 비장한 노래가 불리우곤 했다.) 나가봐야 언젠가는 나도 총알받이가 되어 넘어진다. 그 끝에 가봐야 별 것도 없다. 1등이 되는 게 무어 그리 중요하겠나. 승리도 함께, 패배도 함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상의 즐거움을 잊지 않는 것이리라. 서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소련의 승리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였기 때문이다. 


*소련이 얼마나 이 악물고 싸우는 국가였는지에 대해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다음의 설명을 참조할 것.  https://han.gl/rHDB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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