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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Dec 31. 2020

각자의 생존을 위해 우리가 놓아버린 것

영화 <삼진영어토익반> 리뷰 


영화 <삼진영어토익반> 스틸컷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여자들이 집에 있던 여자들이 나와서 일하기 시작했어. 왜냐고? 싸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마. 죽자 사자 커피 타지 말라고. 그래봐야 임신해서 잘린 총무팀 미스김이 우리의 미래야.”


<삼진영어토익반>에서 이솜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읽고 들었는지 그 리스트가 궁금해진다. 헐값에 팔리는 여성노동에 대해, 그리고 결혼임신출산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는 현실에 대해 이보다 명쾌한 문장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이 별 건가, 내가 지금 여성으로서 어떤 “썁썁”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명확히 말할 수 있으면 되는 거지. 이런 대사가 극 초반부터 따발총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확실히 페미니즘 영화가 맞다. 고졸 여성 사원들이 주축이 되어 회사를 구하는 영웅 서사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공동체성에 대한 이야기

사실 이 영화는 IMF 이후에 우리가 잃어버린 공동체성에 대한 이야기다.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중심에는 고졸 여성사원인 세 친구가 있다. 이들은 상고를 1등으로 졸업해서 삼진그룹의 각 부서에 배치된 말단사원이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승진은 못하고, 고졸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유니폼을 입고 다닌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에게는 같은 처지라는 동지애는 있다. 그것도 일단은 결혼하지 않는 한 당분간은 잘릴 일 없는 한시적 평화에서 지속될 수 있는 우정이다.


파견직이 난무하는 요즘 같은 현실에서는 직장에서의 우정이 다 무어냐, 한가한 소리다. 11개월마다 잘리고 직장을 옮겨야 하는 계약직도 허다하다. <나의 아저씨>에서 아이유가 맡은 파견직 사원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섬처럼 고립되어 있으며, 정규직 사원과는 어울리기조차 힘들다. 사무실이 아니라 공장으로 눈을 돌려본데도 마찬가지다. 어제 옆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사람이 오늘은 나오지 않는데도 그런가보다 한다. 언제 누가 그 자리를 대체할지 모르는 곳, 지속성이 담보되지 않는 직장에서는 서로의 존재를 알고 지내는 것 자체가 사치다. 그러니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같이 싸워줄 사람이 없다.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서 김혜수 


<삼진영어토익반>을 보면서 나는 어쩐지 김혜수가 출연한 작품들이 떠올랐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김혜수가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 한쪽에서는 국가부도에 배팅해서 떼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아인을 비롯한 일군의 사람들이 풋옵션에 걸어서 막대한 돈을 벌고, 사람들이 망해갈 때 내놓은 집들을 하나하나 사들인다. 얼핏 보면 영화 전개와는 동떨어진 것 같지만, 이들이야말로 이 혼란 속에서 승승장구하는 캐릭터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Imf 때 센세이션을 일으킨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시리즈는 여전히 잘 팔린다. "돈을 위해 일하지 말고, 돈이 나를 위해 일하게 하라"는 로버트 기요사키의 말은 그 당시 복음과도 같았다. 세상이 망하는 것은 투자할 돈이 있는 사람에게는 절호의 기회다. 저렴한 가격에 주식과 부동산을 사 들여, 돈이 나를 위해 일하게 할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생존의 법칙이 변한 세상에서 어떤 유형의 인간이 유리한지 유아인 캐릭터는 잘 보여준다.


나는 이 영화에서 허준호의 눈빛이 변해버린 것이 가장 슬펐다. 적어도 협력업체 사장한테는 어떻게든 돈을 융통해서 주려고 했었는데, 본인이 어음 사기를 맞고 나자, 협력업체한테 자기도 어음 부도를 내고 그 손해를 떠넘긴다. 10년 후,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내 식구처럼 살뜰히 챙기던 사장님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외국인노동자한테 욕설을 일삼으며 노동자를 후려치고, 대기업 면접을 보러가는 아들한테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도 절대 믿지 마라." 이것은  IMF 이후의 생존법칙이기도 하다. 뒤쳐진 자를 돌보지 마라, 그러면 니가 죽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누구도 절대 믿지 마라. 각자 도생의 사회에서는 혼자서 열심히 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회사에 나를 의탁하지 말고.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서 허준호


김혜수가 천하무적 미스김으로 열연했던 드라마 <직장의 신>을 보면 허준호가 당부했던 유형의 인간이 나온다. 그는 주변 사람도, 회사도 믿지 않는다. 자기가 맡은 일만 정확하게 처리하고 퇴근해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긴다. 알고 보면 그는 한 기업의 은행원이었다가 정리해고를 당해, 시위에 나갔다가 동료를 잃은 아픔이 있다. 이때의 모티브는 아마도 1998년 이후에 이뤄진 대규모 구조조정이 아닐까 싶다.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인 이후로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뉴스들을 떠올려본다.


외환위기 론스타 매각, 공기업 민영화, KT 구조조정, 재벌세습경영의 폐해, 주주자본주의, 노동유연화, 경직된 노사문화 해소, 쉬운 정리해고... 모두 비정규직과 파견직을 일상화하는 이 일련의 흐름 속에서는 우리는 금모으기 운동이나 하고 있었다. 국난을 극복하기위해 금 팔아서 뭐가 얼마나 외환보유에 도움이 됐을까. 삼진영어토익반처럼 여자고, 남자고, 임원이고, 회장이고 모두 나서서 이대로 IMF가 ‘노동유연화’니 ‘쉬운 정리해고’니 ‘공기입 민영화’니 ‘주주 자본주의’니 이런 말을 휘두르면서 우리 사회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맞서 싸워야 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나자 ‘공동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해졌다. 우리는 더 이상 공존을 말하지 않는다. 각자 도생의 사회에서 경쟁은 기본값이고, 차별은 당연해진다. 어디 비정규직이 날로 정규직을 날로 먹으려고 하냐는 말이 흘러나오고, 고졸자가 대졸자를 이르러 “대학 나오신 분”이라고 칭한다. 코인에 한동안 베팅하던 이들이 이제는 주식에 베팅한다. <국가 부도의 날>에 나왔던 유아인처럼 세상을 뒤집힐 때 한몫 잡으려고, 코로나시국에 주식시장에 밀려든다. 


<삼진영어토익반>을 보고 나오니, 각자도생하는 현실이 비교돼서 슬퍼졌다. 이제 사람들은 혼자 앓다가 조용히 죽어나간다. 자영업자들이 그렇게 힘들면 온라인상에서라도 임대료 법적으로 동결하라고, 조직적으로 목소리를 낼 줄 알았는데... 요즘 기자들은 도대체 어디 가서 인터뷰이을 구하는지 모르겠다. 모여서 목소리 내는 사람들이, 시위하는 현장이 점점 적어진다. 그게 무섭고 두렵다. 악 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고아성이 친구들한테 썁썁 년들이라고, 니네는 이 시국에 토익공부나 하러 가냐고 울면서 소리치던 장면이 참 시원하고 슬펐다. 같은 상황이라면 나는 절대 저런 말 못할 것이다. 남한테 폐를 끼칠 수는 없다며, 나 혼자 앓다 홧병 나서 드러눕고 우울증에 빠지겠지. 도처에 널린 우울증, 자살이 다 혼자서 잘난 사람이 되라고 사회가 말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는 없는데, 사람 인(人자)는 기댄 모양새인데...




<삼진영어토익반>이 그리는 세계는 판타지적이다. IMF 이후를 배경으로는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판타지. 그런 면에서는 응답하라 시리즈와도 닮아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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