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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Dec 31. 2020

<소셜딜레마>를 보고 SNS에 리뷰를 쓰는 자의 한계

넷플릭스 다큐 <소셜딜레마> 리뷰 

뭔가가 퇴화하고 있는 느낌이라면, 그건 바로 SNS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지난 몇 년간 놀라울 정도로 책에서 멀어졌다. 직업이 편집자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지경이다. 이게 다 SNS와 넷플릭스 때문이다. 


전에는 마음이 힘들거나 사람과 세상에 대해 더 알고 싶을 때 시사잡지나 책을 찾아봤다. 지금은 그 반대다. 페이스북에서는 시사 이슈를 알려주고, 인스타그램에서는 맛집과 책을 알려주며, 구독 중인 뉴스레터에서는 각종 분야의 최신 소식을 전해준다. 그래서 그것들을 읽다보면, 책이든, 뉴스든, 잡지든, 영화든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 와서는 이런저런 사람들로부터 몇 번이고 들어본 책의 이름을 메모해뒀다가, 간신히 구매한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완독하기까지가 무척 힘들다. 매달 한두 권씩 사긴 사는데, 끝까지 읽은 책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 다 좋다. 책을 안 읽는 사람은 많고 그래도 세상은 굴러간다. 문제는 생각의 맥락, 감정의 맥락을 자꾸 놓친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뭐 하나에 꽂히면 일주일 내내 그것만 생각한다. 수능이든, 논술이든, 에세이든, 편집할 때든 오로지 하나에만 매달려서 끝까지 파내려가서 의미하는 바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럼 나에게만 반짝, 희미하게 보이는 뭔가가 있다. 정보는 그곳에 다다르기까지 필요한 것들을 선택적으로 흡수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요새는 도저히 맥락을 꿰어맞출 수가 없다. 물밀듯이 들어왔다가 우수수 흩어져서 떨어지는 것만 같다. 나는 파편화된 시간을 살고 있다.



문자메시지도 못 쓰는 사람이, 카카오톡의 노예가 되었다


원래는 문자메시지를 싫어했다. 중3 때 핸드폰 바람이 불어서 모두가 문자 보낸다고 '알'을 구걸할 때, 나는 남아돌아서 나눠주는 사람이었다. 문자의 진동이 싫고, 거기에 일일이 답장하는 게 귀찮았다. 나는 여기의 내 맥락이 있는데, 그 시간에 누군가 난입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침에 일어났는데 카카오톡에 광고 문자만 와 있으면 우울하다. 업무든 관계든 아는 사람으로부터 뭐라도 와 있으면 좋겠다. <소셜 딜레마>에서는 말한다. "아침에 소변 보기 전에 SNS를 확인하나요, 아니면 소변 보면서 확인하나요? 그 둘 중 하나밖에 없는데."(정답: 똥 싸면서 카카오톡을 확인한다.) 


엄밀히 말하면 카톡은 소셜미디어는 아니지만, 중독성 면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하다. 알림이 뜨고, 거기에 실시간으로 답신해야 하며, 시간을 더 잘개 쪼개도록 만든다. 심지어 카톡이 한동안 오지 않으면 이런 생각마저 든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잊은 게 아닐까? 프리랜서라서 더욱 그렇겠지만, 대면하는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는 불안하거나 우울하기가 더 쉬운 것 같다. 


다큐에서는 스마트폰을 통해 SNS가 본격적으로 확산새를 타기 시작한 2010년~2013년 사이에 10대 여성들의 자살율이 놀라울 정도로 높아졌다고 통계를 통해 보여준다. 좋아요와 알람을 통해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그 피드백이 내 정체성을 형성한다면?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비하면, 다모임이니 싸이월드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좌파 고양이는 안 키워준다고?


"이 나라의 국민들은 이제 서로 대화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 국민들은 지난 선거에서 뽑은 사람 때문에 친구와 절교한 사람들입니다. 이 나라 국민들은 고립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말하는 채널만 보면서 말이죠." 


<소셜 딜레마>에 나온 이 대목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그래서 내가 우리 엄마랑, 내 남편이랑 그렇게 대화가 안 통하는구나!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예전에는 저녁 9시에 둘러앉아 같은 뉴스를 보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각자가 속한 온라인 세상에서 편향된 뉴스를 제공받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받아들이는 뉴스만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오늘도 나는 엄마와 한 판 했다. 엄마와 가끔 통화할 때마다 기겁할 이야기를 듣는다. 8.15집회 때 광화문에 나가려고 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못 나간다는 말부터 문재인이 세상을 다 망치고 있다는 말까지...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언제부터 이렇게 위험한 일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너보다 세상을 더 오래 살았고 보릿고개부터 겪어봐서 잘 안다는 엄마의 말에 답했다. "박정희 시절부터 엄마가 잘못된 교육을 받은 거야. 그 향수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박근혜를 그렇게 그리워하겠지. 그리고 그 박근혜를 탄핵한 사람들이 세운 문재인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고." 엄마는 정치 이야기는 그만하자며 말문을 닫았다. 나는 오늘도 설득의 언어를 사용하는 대신 돌직구의 염장을 질렀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 이상 대화하지 않는다.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타임라인에서만 서로 옳다고 추어올린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소통, 연대, 정치- 이런 게 가능할까? 



인스타그램에서 산 마약매트, 코트 다 좋았다고...흑흑 


"자전거가 나타났을 때는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어요. 그렇죠? 다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기에 바빴지 이런 말은 안 했어요. '맙소사, 우리가 세상을 망쳤어. 자전거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녀들과 멀어지게 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헤치며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만들었어.' 도구라는 것은 쓰지 않을 때는 가만히 있습니다.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죠. 뭔가를 당신에게 요구한다면 도구가 아닌 거죠. 당신을 유혹하고 조종하며 당신에게 뭔가에게 뭔가를 요구해요. 우리는 근본이 도구인 기술환경에서 옮겨간 거예요. 근본인 중독, 조종인 기술 환경으로 말이죠." 


내가 빠져들 만한 콘텐츠만 추천해주는 SNS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생각의 맥락을 다시 찾아오려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절교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가려면? 다큐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희망을 말하며 끝난다. 요는, 시민이 권력을 가지고 정부의 규제를 통해 플랫폼 기업이 사용자에 대한 과도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을 멈추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의 광고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경험해봐서 안다. 지난겨울에 산 마약매트랄지, 코트랄지... 이들 기업이 마케팅에 관한 한 어느 기업보다 독보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이 데이터에 어떻게 제동을 거느냐 하는 것이다. 글쎄, 꿀에 취한 꿀벌이 그 안에서 스스로 헤어나올 수 있을까.


스크린이 가져다준 디스토피아는 이미 당도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번에는 <블랙미러> 봐야지. 아아, 넷플릭스의 노예여...사둔 책들은 언제 다 볼 거냐ㅜ 시간 예산제, 콘텐츠 예산제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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