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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Dec 31. 2020

우리가 바로 '김지은'이다

- 고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사건에 부쳐 

고 박원순 시장 사건 이후로, 잠잠했던 기억들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나를 대놓고 성추행했던 남자들은 다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조교였을 때 그는 교수였으며, 신입 편집자였을 때 그는 업계에서 널리 알려진 번역자였다. 고소하고 싶은데 한 명은 이미 죽었고(사인은 모른다), 한 명은 죽을까 봐 걱정스럽다. 내가 보기에는 지킬 명예도 남아있지 않은데, 밥줄이 끊기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만약 그 당시에 그의 성추행에 대해 끝까지 문제제기를 했더라면, 회사에서 과연 나를 보호해주었을까? 만약 공론화해서 그 사람 번역을 다 빼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오히려 회사에서 나를 자르지 않았을까? 그럼 내가 출판계에서 무사히 편집자로서 경력을 쌓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나는 출판계에서 그대로 아웃되었을지도 모른다. 신입사원 5개월차에 당한 성추행, 그 이후로도 이어진 지속적인 플러팅은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팀에서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그가 몇십년째 쌓아온 명성에 비해 나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신입 편집자에 불과했다. 그 정도 추행은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증거도 없고, 나서줄 증인도 없다. 그래서 고소 못 한다. 꾹꾹 묻어놨다가도 이런 사건이 터지면 트리거가 되어 화가 뻗쳐올라온다. 


가해자에게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서사가 있다. 현재 성범죄로 논란이 되었더라도, 그는 여러가지 얼굴을 가진 '인간'이고, 현재 공적으로는 이런저런 것들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으며 사적으로는 가장이다, 그러므로 그의 죄는 복잡다단한 결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에게는 빛나는 과거가 있었던 만큼, 전도유망한 미래가 있다는 논리가 따라붙곤 한다. 왜 성범죄는 가볍게 치부되는지, 왜 가해자의 과거와 미래는 그토록 중한 것으로 평가되는지, 생각할수록 복장터진다.


피해자의 서사는 납작하게 남는다. 그에게도 현재를 위해 노력했던 과거가 있으며, 꿈꾸던 미래를 가해자가 박살내 버렸다는 사실은 조명되지 않는다. 상사를, 사장을, 모시던 시장을 고소하려면 그 바닥을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 게다가 그가 안희정이나 박원순처럼 공적으로 신망받는 인물이라면, 너 하나 때문에 그 훌륭한 사람이 정치적으로 사장되었다는 온갖 2차 가해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이 모든 것을 건너 고소를 감행한 사람의 내면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2차 가해를 걱정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도 일축해버리는 지경이다.


성폭력, 성추행, 성희롱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업계를 떠난 숱한 여자들이 있다. 그들은 시작도 못해보고 사라졌다. 그들이 만약 순탄히 그 자리에 남을 수 있었더라면, 무엇을 이뤄냈을까. 왜 그들의 과거와 미래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되는가?


시민운동가로서, 시장으로서 박원순이 탁월했다는 건 안다.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최소한 그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선의만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불길한 뉴스로 가득했던 그날도, 극단적인 선택의 이유가 미투와 관련된 것만은 아니길 진심으로 바랐다. 이 모든 것이 과거형이 되어버린 것은 그의 결말이 너무나도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안희정이 살아 있어 고마운 날이 올 줄 몰랐다. 그는 뻔뻔스러울지언정 살아서 죄값을 치르고, 치욕을 감내하고 있다. 본인이야 억울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이 세상에 남아 있다. 살아있다면 미약하게나마 잘못을 뉘우칠 가능성 또한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


박원순 시장은 미래를 아예 통으로 포기해버렸다. 그는 변명하거나 사죄하거나 죄값을 치르거나 용서를 구하거나 하지 않고, 과거의 영광을 지키는 편을 택했다. 이후에 펼쳐진 풍경은 그가 상상했던 대로일 것이다. 언론에서는 연일 그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 과거의 발자취를 정리해 새삼 대서특필하며, 애도하는 사람들의 말을 중계한다. 그가 무엇 때문에 자살을 감행했는지는 모른다는 투로, 그저 공소권 없음이라는 간단한 단어 안에 가둬두려고 한다. 괄호가 되고 침묵이 될 때까지, 그들은 공적만 앞세워가며 애도한다.


더 나은 서사의 가능성을 포기한 사람에게 이 사회는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다. 나는 거기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다. 박원순 전 시장이 어떤 업적을 이루었든 간에, 내게는 성추행 고소가 날아든 다음날 무책임하게 자살해버린 공인으로 먼저 기억될 것이다.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성범죄가 한낱 인생의 오점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동의할 수 없다. 내게 그는 노회찬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같은 줄이 아니라, 안희정 오거돈과 같은 줄에, 그보다 더 아래 칸에 기입될 것이다.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미래를 써나가는지 지켜보며, 그들과 연대할 것이다. 우리는 성범죄의 피해자로서만 살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가 있는 입체적인 인간이다. 


여성들은 누구나 김지은 같은 사람을 하나 이상은 알고 있다. 올해의 책이 단연코 <김지은입니다>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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