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화 Mar 07. 2018

설거지하는 페미니즘

[3.8 세계여성의 날] 가사노동의 혁명을 위하여 

너와 나의 집들이 잔혹사 


지인의 집들이에 갔을 때 일이다. 그날의 호스트는 남편이었다. 남편의 친구, 그 친구의 부인과 자식들까지 손님이 족히 스무 명은 되었을 것이다. 점심부터 시작된 집들이는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가까이 사는 사람은 들렀다가 가고, 멀리 사는 사람은 자고 갔다. 부인은 그 입들을 다 거둬 먹였다. 잡채부터 각종 전, 나물, 갈비까지 손 많이 가는 음식들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올라왔다. 사 온 음식은 없었다. 맞벌이하느라 바쁠 텐데 그 많은 메뉴를 언제 다 준비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녀가 집요정 도비처럼 일하는 동안, 남편은 거실에 앉아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부엌 가까운 자리에 있던 여자들이 주로 술을 날랐다. 날이 어두워지자 입이 물린 손님들은 배달 음식을 시켰다. 부인은 그제야 마음 놓고 술을 마셨다. 그것도 잠시, 아이들이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잘 시간인데 어른들이 놀고 있으니 자기네들도 악을 쓰고 깨어 있으려 했다. 엄마들만 그 잠투정을 알아듣고 아이를 체포해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이를 재우고 나온 그녀의 얼굴은 피곤으로 창백했다. 먹는 입과 일하는 손이 따로 있는 장면을 보니 심사가 뒤틀렸다. 나는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에도 작은 집들이가 열렸다. 내 지인들로 구성된 손님은 딸랑 두 명. 평일 낮에 와서 간단하게 떡국이나 해 먹이고, 영화 한 편 보고 보내려 했다. 그런데 남편이 생각보다 일찍 퇴근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하게 술자리가 벌어졌다. 과자 부스러기와 맥주를 먹고 있는 광경이 보기 딱했는지 남편은 자꾸 냉장고를 뒤졌다. 안주를 찾는 그 동작이 왠지 부담스러웠다. 내 몸은 반사적으로 일어나 같이 부엌으로 향했다. 내 친구가 놀러 왔는데 남편이 일하는 게 불편했다. 평소에는 요리도 잘 하지 않는 저 인간이 왜 그럴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아뿔싸, 생각났다. 언젠가 남편의 친구들을 맞아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을 대접하느라 허리가 끊어질 뻔한 집들이 추억이 말이다.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중에서/말풍선으로 '죽고 싶지 않으면 설거지는 니가 해' 가 어울릴 듯


우리 집 구도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안주와 술이 떨어질세라 종종거리는 동안 남편은 거실에 앉아 친구들과 놀고 또 놀았다. 돌이켜보면 1, 2문단의 내용은 내 기억을 리플레이한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1박 2일의 집들이가 끝난 뒤, 남편은 말했다. 다음에 내 친구들이 놀러오면 자기가 상을 차려주겠다고. 그래서 그는 손수 비빔면을 만들어왔던 것이다. 내 노동에 비하면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수준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감지덕지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억울해졌다. 그때 나는 왜 그것도 편하게 받아먹지 못했을까. 



머리에는 페미니스트가, 몸에는 집요정이 산다 


80~90년대에 태어난 우리는 남녀평등의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학교에서는 똑같이 성적으로 경쟁했으며, 꿈꾸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배웠다. 심지어 나는 어쭙잖게 페미니즘도 공부했다. 막상 결혼하고 나니, 지금까지의 생각을 비웃듯 내 몸은 다르게 반응했다. 퇴근하고 집에 오자마자 부엌으로 직행하는 사람은 나였다. 남편은 옷부터 갈아입고 쉬었다. 우리는 몸의 디폴트값부터 달랐다. 내 몸은 노동에, 그의 몸은 휴식에 우선순위를 부여했다. 그런 그를 설득해서 부엌으로 나오게 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이미 큰 스트레스였다. 


집안일은 측정하기 어렵고, 보상이 없으며, 자발성에 크게 의존하는 노동이다. 그래서 이미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 사람을 일하게 하기란 쉽지 않다. 첫째, 남편도 집안일을 일정 부분 수행하고 있으며(청소, 분리수거, 가계부 관리 등) 둘째, 추가로 집안일을 더 한다고 해서 돌아올 보상이 없다. 오히려 미숙함 때문에 잔소리를 들을 확률이 높고(오늘도 설거지하고 행주를 빨지 않았다!) 칭찬을 듣는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휴식과 맞바꿀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이런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가급적 부인은 ‘도움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왕복 2시간 반이 걸려서 집에 도착한 나에게는 좋게 말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앓느니 죽지’ 하는 마음으로 차라리 내가 빨리 해치우는 게 낫다고 여겼다.


이 결정은 점점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나는 요리를 할 줄 알아서 능숙해졌고, 능숙해져서 더 많이 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졌다. 남편도 볶음밥이나 고기 굽기 같은 기초적인 요리는 할 줄 알았지만, 대게 주 1회 이벤트에 그쳤다. 1년쯤 지나자 나는 가사 노동을 주도하고 남편은 보조하는 형태가 굳어졌다. 그렇게 내 안의 집요정은 점점 자라났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 중에서/ 생각해보니 도비도 해방됐다...



다른 맞벌이 친구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애가 있든 없든, 벌이가 많든 적든, 여성은 남성보다 가사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었다. 우리는 점차 표준치에 가까워졌다. 여성은 하루 평균 가사 노동에 3시간 20분을, 남성은 40분을 쓴다는 통계청 수치는 참말이었다. 집들이는 평상시 가사 노동의 불평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집에서 배운 반쪽짜리 평등


왜 여성은 집에서 노동하는 몸을, 남성은 쉬는 몸을 갖게 되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대부분 엄마가 주 가사 노동자인 모델을 보고 자라왔다는 점이다. 딸과 아들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다른 것도 한몫한다. 예전 할머니들처럼 아들이라고 부엌에 얼씬도 못 하게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아들에게 집안일을 장려하지는 않는다. 반면 딸에게는 은연중에 집안일이 권장된다. 거칠게 말해서 첫째가 딸이라면 맏딸이니까 동생을 돌볼 것을 기대하고, 둘째가 딸이면 집안 서열의 끝이니까 시켜먹기 쉽다. 반면 첫째가 아들이라면 장손이라서, 둘째가 아들이면 막내라서 집안일에서 제외된다. 여기서 벗어나는 경우도 많겠지만, “시집가면 지겹도록 할 텐데 뭐하러 지금부터 하느냐.”고 딸의 설거지를 말리는 엄마의 말에는, 아무리 시대가 달라져도 결국은 여성이 가사 노동을 하게 될 것이라는 숙명론적인 체념이 담겨 있다.  


그래서 성인 남성과 남자아이는 대체로 집안일에서 제외돼 왔다. 통계청 발표에서 20대부터 50대까지 남성의 가사 노동 시간이 일관되게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공백은 주로 성인 여성 혼자서 메워왔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여아가 동원됐다. 예를 들어 내 경우에는 야근하는 엄마를 대신해 중학생 때부터 내가 할아버지부터 아빠, 오빠의 물심부름은 물론 상까지 차려 대령하곤 했다. 그것은 가부장제 속에서 차마 남자들과 집안일을 나누지 못한 엄마가, 집안에서 유일한 약자인 내게 가사 노동을 전가한 결과였다.  



남자들의 집안일 회피 전략, 이젠 안 통한다! 


나는 혼자 집안일 하느라 골병들고 싶지 않다. 만만한 딸한테 집안일을 전가하기도 싫고, 아들을 자기 한 몸 돌보지 못하는 무능한 인간으로 만들기도 싫다.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남편하고 최대한 집안일을 나눠야 한다. 가사 노동의 불평등을 다룬 도서 『아내 가뭄』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간은 대개 익숙한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 바로 그 때문에 지난 50년간 여성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도 남성에게는 아연실색할 정도의 아주 작은 변화만 일어난 것이다.” 익숙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싶을 때, 그때가 바로 싸움을 시작해야 할 때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일단 남자들의 주요 전략부터 알아보자.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는 여성 저널리스트가 쓴 『빨래하는 페미니즘』에는 1970년대에 나온 팻 메이너디의 수필 『가사 노동의 정치학』에서 집안일을 거부하는 남편의 핑계를 발췌해 소개한다. 첫 번째 유형은 ‘아무것도 몰라요.’ 유형이다.    

  

[유형①]  ‘아무것도 몰라요.’


“난 아직 일에 서투르니까 어떻게 하면 되는지 당신이 먼저 보여줘.”


숨은 뜻: 앞으로 나는 일을 할 때마다 당신에게 방법을 물어볼 거고, 그럴 때마다 당신이 나에게 일하는 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어야 할 거야. 또 내가 일을 하는 동안 앉아서 책이나 읽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왜냐하면 당신이 직접 하는 게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당신을 약 올리며 괴롭힐 테니까.


이는 배움을 가장한 수동 공격으로, 실제로 여기에 휘말리면 ‘입 아프게 떠드느니 내가 하는 게 낫지’ 하는 의도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나는 정공법을 추천하고 싶다. 가사 노동도 ‘노동’이다. 회사에 들어가면 처음에야 사수가 큰 틀을 알려주겠지만, 세세한 부분은 직접 알아보고 터득해야 한다. 나도 요리를 글로 배운 처지에 뭘 알려주겠나. 여전히 양념 비율을 못 외워서 할 때마다 찾아보는데. 기억 못 하면 바보 취급받을 만한 기초적인 것만 알려주고, 그 외에는 궁금하면 직접 알아보라고 공을 떠넘겨 주자.    


[유형②] 시간 핑계 


“집안일은 당연히 우리 둘이 공평하게 해야지. 그런데 내가 무조건 당신 스케줄에 맞출 수는 없잖아?”


숨은 뜻: 집안일을 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을 때만 할 거야. 설거지는 일주일에 한 번, 빨래는 한 달에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해. 이게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에게 뭐라고 하지 말고 당신이 직접 해. 


집안일을 놓고 5년 동안 줄다리기를 해 온 한 선배는 이런 경우를 대비해, 분업 체계를 철저하게 지킨다고 한다. 설거지든, 빨래든 남편이 바쁘다는 핑계로 거르면 그대로 쌓아두는 것이다. 본인이 답답해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그것이 다시 자기 일로 넘어오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영역임을 명확히 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놔두자. 더러운 꼴도 감내하는 인내심도 함께 키워야 할 것이다.    


[유형③] 죄책감 심어 주기


여자들이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남편은 회사에서 요즘 얼마나 힘든지를 어필하거나, 당신이 없어서 아이가 얼마나 불행해했는지를 줄줄 읊어댈 수도 있다. 하지만 회사에서 힘든 것은 여자도 마찬가지다. 필사적으로 야근을 하지 않으려 업무 강도를 최대로 올리고, 회식이라도 있으면 1차만 마치고 집에 일찍 돌아오려 눈치를 봐야 한다. 여자라고 중요한 프로젝트 맡고, 인맥 쌓아서 승진하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힘들다고 말하면 “그렇게 힘들면 그만둬.”라는 대답을 듣기 십상이니 자제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자제하지 말자. 아니, 남편보다 선빵을 날리자. 회사에서는 출산휴가 쓴다고 눈치 주고, 집에 오면 애 돌봐주는 시부모님 눈치 보느라 힘들다고, 그런데 내 연봉은 내년에 얼마가 오를 예정이라고 말이다. 맞벌이의 최대 장점을 부각하자. 그리고 남편의 적극적인 가사 노동 분담이 필요함을 역설하자. 남자들은 말을 안 하면 정말로 남의 속을 모르는 것 같다. 사정도 모르고 자기 연민에 빠지기 전에 지속적으로 현실을 일깨워 주자.    


아이가 없어서 엄마가 불행하다는 말에도 속지 말자. 물론 아빠와 같이 있어도 아이가 엄마를 그리워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닌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아빠가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 아이도 아빠를 신뢰할 만한 양육자로 받아들인다. 역사적으로 아이는 대가족에서 돌봄을 받으며 자라왔다. 엄마만을 따라다닌 것은 핵가족이 탄생한 이후의 일이다. 엄마가 떨어져 있어서 아이가 불행해하다고? 그것은 아빠 네가 더 노력해야 한다는 신호다.


이외에도 핑계는 가지가지다. 친오빠는 “설거지를 하고 싶은데, 싱크대 앞에만 서면 발이 간지럽다.”는 핑계를 상습적으로 대곤 했다. 남편은 “집안일 리스트부터 정해서 가사 노동을 각각 얼마나 하는지 체크해 보자.”며 반격한다. 이는 서류 작업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내 약점을 파고든 것으로, 이 때문에 나는 아직도 가사 노동을 동등하게 배분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또한 남편은 종종 집안일을 많이 한 날이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내게 냉랭한 태도를 취하곤 한다. 일종의 침묵시위다. 남편이 예전보다 집안일을 많이 하고는 있지만, 나는 오늘도 진화하는 수동 공격에 대비할 방법을 모색하는 중이다. 



일방적인 희생보다 고통의 공동체 


배우자와 가사 노동을 공평하게 나눈다는 사람들을 가뭄에 콩 나듯 본다. 이들의 증언은 한결같다. 엄청 싸웠다는 것이다. 그것은 3년, 5년, 10년이 걸릴 수 있는 장기 전투다. 그 과정에서 서로 심한 내상을 입기도 한다. 그리고 동등한 가사 노동을 하는 체제가 안정되어도, 육아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절대 노동량이 많기 때문에 어차피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믿는다. 일방적인 희생보다는 고통의 공동체가 낫다고 말이다. 부인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구축된 평화는 남편에게 지금 당장 편한 것일 뿐이다. 나 개인의 행복,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 가사 노동의 평등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실 아버지에게 좋은 것이기도 하다. 자녀들과 친밀하게 소통하려면 육아를 해야 하고, 혼자 남아서도 건강하려면 자기를 돌볼 줄 알아야 한다. 여자들이여, 가사 노동의 혁명을 위하여 더 많이 설치고 떠들자. 일상 구석구석, 우리에게는 더 많은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04407


매거진의 이전글 '며느라기'에겐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