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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Jun 13. 2017

'전라도 무섭다'는 엄마와 떠난 구례 여행기

모녀의 투다투닥 5.18 구례 여행  

“그런 얘기하지 마라, 잘못하면 니 머리 다 뜯긴다이.”


구례 가는 버스 안에서 엄마는 속삭이듯 말했다. 경계하듯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더 이상 말 걸지 말라는 신호다. 모녀가 함께 전라도 여행을 떠난 날은 5월 18일, 마침 버스 안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세상이 제자리를 잡아가는가 싶어 벅찬 마음에 몇 마디 보탠 게 엄마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사실 박 여사는 공공장소에서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다. 21세기에도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양반이다. 목적지가 전라도라서 움츠러든 것도 있다. 경상도 출신으로 상경한 지 30년 째, 전국 팔도 사람을 다 만나봤을 테지만 엄마는 유독 전라도 사람을 두려워한다. 속을 알 수 없고 뒤통수를 잘 친다나 뭐라나. 이런 말을 입에 올릴 때는 집에서라도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연신 살핀다. 그 표정이 사뭇 진지해서 골려주고 싶을 정도다.


이날도 엄마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버스를 탄 순간부터 말수가 줄어들었다. 나는 깐죽대며 물었다. “엄마, 경상도 사투리 쓰는 거 들킬까 봐 말 안하는 거지?” 엄마는 0.1초의 고민도 없이 응, 하고 답했다. 아아, 박 여사의 이 시대착오적인 두려움을 어찌하면 좋을꼬! 이래서 맨날 여수, 순천, 오동도 노래를 부르면서도 놀러 한번 못 갔나 싶다. 이 겁 많은 아지매가 여행 내내 묵언수행을 하면 어쩌나 걱정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엄마, 진짜 말 안할 거야?


정오 무렵, 구례에 도착했다. 가오리찜을 잘하기로 유명한 식당으로 향했다. 서너 테이블이나 찼을까, 평일 낮이라 그런지 한산하다. 낮술하는 잔들 위로 선선한 바람이 지난다. 긴장이 풀린 이들의 목소리가 앞뒤에서 적당히 날아든다. 편안하게 밥 먹기 좋은 정도의 소음이다. 그래도 엄마는 여전히 말을 아꼈다. 우리는 가오리 살만 열심히 발라먹었다. 금방 뼈가 드러났다. 고작 이거 먹으려고 2만 원이나 줬나 싶어 억울해지려는 찰나, 아까부터 우리 테이블을 주시하던 사장님이 다가왔다. 가오리는 뼈까지 오도독 다 씹어먹어야 돈값을 한다고 했다.


 아, 그렇습니까. 조언을 받들어 충실히 먹고 있는데, 사장님이 금방 다시 나타났다. 뭐가 성에 안 찼는지 이번에는 젓가락까지 들고 왔다. 이건 양념장 맛으로 먹는 거라며, 곁들여 나온 부추찜을 초장과 간장에 푹푹 찍어서 나 한 번, 엄마 한 번 앞접시에 담아주었다. 세 번째로 젓가락을 들길래, 이걸 다 먹여주실 셈인가 싶어 난감해졌다. 그런데 이번에 집어든 부추는 사장님의 입으로 직행하는 게 아닌가!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우리 일행인 줄 알았다. 이렇게 사적인 서빙은 처음이야! 사장님은 천연덕스럽게 입을 쓱 닦더니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바람이 경계심도 쓸어갔는지, 그 의뭉스러움마저 정답게 다가온다. 산과 하늘이 너른 곳에서는 안전거리가 쓸모없어지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옆 테이블에서 말을 걸어온다. “엄마랑 딸이랑 같이 여행 오셨나 봐요. 보기 참 좋습니다.” 온화한 느낌의 중년 아재가 웃음을 지어보였다. 엄마도 어색한 듯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숨길 수 없는 경상도 억양으로 그 아재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라도 사람 무서워하는 박 여사는 어디 갔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재가 우리 밥값을 대신 계산해주려 했단다. 어쩌면 그는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가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투닥거리는 모녀를 바라보던 눈빛에는 그리움이 묻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가재눈을 뜨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노. 넘(남)한테 함부로 얻어먹으면 안 된다이.” 하모, 하모요~ 박 여사가 맺고 끊고를 못해서 가까운 경상도 사람한테 수없이 당했다 아입니까.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가정사라 생략한다.     


구례에서 만난 5월의 들꽃. 이름을 몰라줘서 미안하다...


그래도 낯모르는 사람들의 환대에 마음이 좀 누그러진 모양이다. 화엄사 행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창밖으로 익숙한 고유명사를 발견했다. ‘마산면’이라는 표지판이 떡하니 서 있었다. 경상남도 마산 출신인 엄마는 자기 고향 사람들이 화개장터를 건너와, 이 동네에 자리 잡았을 거라는 해석을 내 놓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뒷산 능선이 말을 닮았다 하여 말 마(馬)자를 붙여 마산으로 불렸으며, 충청남도에도 같은 지명이 있다고 한다. 이를 알 리 없는 박 여사는 다분히 자기중심적인 해석 끝에, 여기에 집 짓고 살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내비쳤다. 시골에서 텃밭 일구며 사는 게 소원이라지만 이렇게 사람이 급선회할 수가 있나! 뒤로는 지리산이 내려앉고 마을 앞으로는 섬진강이 굽이쳐 흐르며 보리밭이 끝없이 펼쳐진 구례에, 날 좋은 5월에 왔으니 반할 만도 하다. 변덕도 참 화려하시다.

 

“근데 5.18은 왜 일어난 기고?”


화엄사 입구에 내려 걷기 시작했다. 일주문까지는 30분 남짓, 계곡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나무 그늘 사이로 천천히 걸었다. 엄마가 물었다. “근데 5.18은 왜 일어난 기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반공정신 투철한 박 여사(그래도 2번을 찍진 않았다.)의 입장에서 보면 딸년은 빨갱이에 가까운데, 현대사에 대해 물어보시다니? 이때다 싶어 나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아는 대로 쏟아냈다. 엄마가 마산 살던 시기에 일어났던 1979년 부마항쟁을 비롯해 10.26박정희 암살,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가 집권한 12.12사태를 거쳐 5.18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감정에 호소하는 쪽으로 풀어나갔다.    


"…그래서 전남대 대학생들이 군부 집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좀 세게 했나 봐. 군인들이 몰려와서 백주대낮에 자기네 아들딸을 개 패듯이 때려 잡아가고 죽이는데, 이걸 어찌 보고만 있어. 그래서 자기들끼리 시민군을 조직해서 군인들 몰아내고 광주 시민들끼리 자치를 했네. 결국 며칠 뒤에 트럭 타고 공수부대원들이 몰려와서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에 남아있던 시민군을 다 쏴죽였잖아."


곰곰 듣고 있던 엄마는 말했다.


"야, 내라도 뛰쳐나갔겄다! 멀쩡한 사람을 죽이기는 와 죽이노? 내 자식한테 그랬으믄 마, 아이고야…."


하필 5월 18일에 구례에 놀러와서는 전라도 사람을 무서워한 게 맘에 걸렸는지 엄마는 미안한 얼굴로 덧붙였다.


나는 몰랐지….


삼십 년의 간극


그렇다. KBS만 보고 살아온 엄마는 몰랐을 것이다. 바깥일을 하면서도 하루에 열 번 밥상을 차려내던 그녀의 유일한 낙은 8시 반에 하는 드라마를 보고, 9시 뉴스를 보고 잠드는 것이었다. 10시만 되면 피곤에 지쳐 닭처럼 꾸벅꾸벅 조는 박 여사에게 교양 프로그램은 사치다. 지금은 은퇴해서 시간이 많지만, 핸드폰으로 유투브를 시청한다거나 TV프로그램을 다운받아 보는 건 생각도 못한다. 카톡도 엉금엉금 겨우 배웠다. ‘빨갱이’ 말만 나와도 도망가고 보는 습성은 박정희 시대에 공교육을 받은 유산이다. 근현대사 해석에 관한 한, 엄마의 시계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79년에 멈춰 있다.


실은 나도 대학에 와서야 5.18을 왜 민주화운동이라 부르는지 알았다. 수능볼 때까지만 해도 3.15, 4.19, 10.26, 12.12, 5.18, 87년 6월 10일은 그저 외워할, 현대사의 숱한 숫자로만 남아 있었다. 그게 얼마나 헷갈렸냐면, 일제강점기 때 간도에서 의용군과 팔로군을 비롯해 독립운동을 벌였던 수많은 분파를 구분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러다가 대학교 와서 선배들과 함께 5.18답사를 가서야 그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부르고, 윤상원 열사의 묘에 가서 참배를 하고, 금남로를 거닐어 보고서야, 그 모든 사건이 민주화를 위한 하나의 연속된 과정이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가 광주에 가 있는 그 시간에도 엄마는 일하고 있었다. 그 덕에 대학을 졸업했으면서 이제 머리가 굵은 자식은 부모를 얕잡아 보며 상식을 운운한다. 모름을 고백하는 엄마의 말에, 나는 왠지 미안해졌다. 처음 나한테 한글을 가르쳐줬을 때 모른다고, 느리다고 비웃지는 않았을 텐데….


엄마는 뜻밖의 해결책을 내놨다.


“야야, 내 같은 사람들 많을 낀데, 구청에서 하는 문화센터 강좌에서 역사나 좀 알려주면 좋겄다. 할매 할배들이 맨날 영어, 컴퓨터 엑셀 이런 거 배워서 뭐할 끼고. 블로그 백날 알려 줘봐야 다음날 되면 바로 다 까먹어 버리는데.”


의외의 아이디어에 나는 물개박수를 쳤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다. 어르신들의 역사관이 바뀌면 안보 장사도 어려워지지 않을까? 어차피 정권 바뀌면 또 교과서 뒤집자고 할 게 뻔한데, 이제는 칼자루를 쥐었으니 방어를 할 게 아니라 공격을 하면 좋겠다. 시청, 구청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는 한 달에 2만원밖에 안 하니, 학구열에 목마른 어르신들을 상대하기에는 딱이다. 답사할 곳도 천지다. 꽃놀이 하느라 바쁜 어르신들, 올라오는 길에 광주에 5.18 묘역도 둘러보시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비극이 서린 역사적 현장을 찾는 다크투어리즘을 일반 관광과 결합해 상품으로 내놓는 거다! 내가 이런저런 아이디어로 폭주하자, 엄마는 지루한 듯 딴청을 부린다. “날이 가물다더니 여(기) 계곡은 물마를 새가 없는 갑네. 물소리가 참 좋다~”


아무튼 미워할 수 없는 없는 박 여사였다.



밤하늘을 산책하며  


그날 저녁, 숙소에 짐을 풀고 엄마와 함께 밤마실을 나왔다. 별들이 너무나 크고 선명해서 낚싯대를 드리우면 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북두칠성을 온전히 세어보았다. “니 완전 서울 촌년이네. 북두칠성을 우째 처음 보노.”


 ⓒpixabay


비현실적이리만치 아름다운 밤하늘을 함께 바라보며, 1960년대에 마산에서 태어나 육십 평생을 살아온 엄마와 1980년대에 태어나 삼십 년 남짓 산 내가 거쳐 온 풍경의 간극을 헤아려 본다. 그래도 우리가 저 별들만큼이나 멀진 않겠지, 최소한 그 순간만큼은 같은 곳을 바라보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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