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짓기의 수렁에 빠진 어느 편집자의 발악
요즘 말린 북어가 되어가고 있다. 책 제목을 정해야 하는데, 도무지 결정을 못하겠다. 보통 제목은 본문 속에 있다고들 하는데, 본문을 하도 읽어서 딱히 새롭게 보이는 단어가 없다. 서점을 가고 SNS를 이 잡듯이 뒤져봐도 결론은 하나다. 내가 쓰고 싶은 제목은 이미 남들이 써버렸다는 것. 눈 밝은 편집자들이 얄밉게도 다 가져다 써버렸다! 아쉬운 마음도 잠시, 자나 깨나 오로지 제목 생각뿐이다. 이렇게 산 지 한 달이 넘었다. 마른 수건을 하도 쥐어짠 나머지 이제는 북어처럼 뻣뻣해질 지경이다.
돌이켜보면 제목을 쉽게 지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출판사에 입사해 처음 책을 만들 때, 5주에 걸쳐 100개가 넘는 제목을 생각했더랬다. 편집장이 자꾸 이건 아니라고 하지, 제목안회의에서 몇 주째 멘탈이 부서지던 때였다. 위기의 순간, 내게 영감을 준 곳은 마트였다. 당시 마트에서는 하루치 견과류 믹스를 소분해서 파는 상품이 날개 돋힌 듯 팔리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견과류 먹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하루 견과’로 나눠 판다? 그럼 어떤 습관이든 ‘하루 한 번’만 꾸준히 실천하면 되는 거잖아?’ 마트에서 유레카를 외친 나는, 이런 제목을 내었다. “부와 건강, 행복을 부르는 습관 ‘하루 한 번 호오포노포노*’” 제목 컨펌을 받았을 때의 그 짜릿한 해방감이란. 나올 듯 말 듯 괴롭히던 그 무언가를 드디어 밀어낸 그 기분! 지독한 변비에 시달려본 사람은 이 쾌감을 알 것이다.
*‘호오포노포노’ 는 하와이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기억 정화법이다. 미국 뉴에이지 영성에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보시길. 영업하는 것은 아니다. 첫 책은 대체로 흑역사이게 마련이니까.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지금, 나를 쪼아댈 편집장은 없지만 내 안의 제목 판관은 더 가혹하게 군다. 그는 묻는다. “이게 과연 최선인가? 니 돈 들여 내는 책인데 이 제목으로 정말 괜찮겠어?” 나는 사정한다. “일주일만 말미를 주십시오.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렇게 결정을 미루는 동안 이번 책의 기획안을 세 번이나 뜯어 고쳤다. 이 방향이 맞는지 확신이 안 선다. 그래서 본문을 다시 읽었다. 원고를 노려봐도 답은 나오지 않고, 머릿속에 떠다니는 단어를 붙잡아 브레인스토밍해본다. 나의 저자는 누구인가, 삶의 철학을 한마디로 소개한다면?
이날도 머리를 쥐어뜯다가 급기야 이런 글을 쓰기에 이르렀다.
“저자 김송희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다. 그는 소비의 왕이자 이직의 왕이다. 나한테 뭐가 맞는지 알기 위해 이것저것 다 시도해본다. 집에는 택배상자가 가득하고, 이력서 칸은 각종 경력으로 넘쳐난다. 이직도 많이 한 데다, 셀 수 없이 많은 외주를 했기 때문. 그러다 이제는 <빅이슈>에 안착했건만 매일 지는 경기에 나가는 기분이란다. 코로나 때문에 잡지가 그렇게 안 팔린다고. 어쨌든 2주에 한 번 잡지는 나오고, 표지가 펑크 나도 울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인간 김송희. 모르는 여자의 죽음에 자신의 운명을 포개보고는, 고양이를 끌어안고 잠드는 김송희. 우는 와중에도 좋아하는 옛날 드라마 틀어놓고 하이볼에 최신 안주 곁들여서 성실하게 먹고 마시는 김송희. 옅은 우울과 불안을 달고 살지만 눈앞의 반짝거리는 것들에 홀려서 오늘도 즐겁게 물건을 사고 카드값 갚으려 열심히 일하는 김송희, 좋아하는 것을 사기 위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김송희……. 아아,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누구란 말이냐!”
> 브레인스토밍의 흔적
SNS에 글을 쓰다가, 배고파서 퇴근해야겠다며 급 마무리했다. 댓글이 달렸다. “이거 제목인데? ‘배고프니까 퇴근해야겠다.’” 이 사람이, 장난하나…나는 부글부글하는데, 카카오톡으로 다른 친구가 반응을 보인다. “‘배고프니까 퇴근해야겠다’ 이거 아무리 봐도 제목 같아. 재미있어. ‘배고프니까 퇴사해야겠다’는 어때?”
오호라, 이거구나. 책 제목 짓는 건 나한테나 힘들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재미있는 놀이가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야 할 시점이다. 출판사 안에 있을 때 제목안 들고 마케팅부며 온갖 부서를 돌아다니며 사람들한테 의견을 구했던 것처럼, SNS의 친구들에게 의견을 구해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나온 제목을 정리해서 투표에 붙였다. 후보는 자그마치 14개였다. 이중 상위 후보 4개를 추렸다.
제목 후보
① 내 꿈은 무자식유주택 할머니 - 8표
② 다 울었으면 일하러 가자 - 6표
③ 매일 지는 경기에 나가는 기분-5표
④ 부정적인 사람의 응원법-5표
제목은 책의 간판이다. 아무리 본문이 훌륭해도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으면, 독자를 만날 수 없다. 간판만 그럴싸해서도 곤란하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별것 없다면, 손님은 그 가게를 다시 찾지 않을 것이다. 제목은 독자의 흥미를 끌 만큼 매력적이되, 본문을 충실하게 표현해야 한다. 이 밸런스를 절묘하게 맞춘 제목을 찾아야 한다.
<내 꿈은 무자식유주택 할머니>는 사실 본문과는 거리감이 있다. 저자는 말했다. “무자식?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결혼도 안 했는데 자식 생각?” 맞다. 그는 결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유주택자가 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고 있지도 않다. 이 제목은 1인 비혼가구 여성의 이루기 어려운 꿈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할머니’라는 것도 한물 지난 표현인 것 같다. 작년에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히트한 이후로, 비슷한 카피를 여기저기서 많이 봤다. 가장 많은 표를 받았으나 본문과 싱크로율이 낮고 이미 식상한 표현일 수도 있어 패스.
<다 울었으면 일하러 가자>는 오은영 박사님을 활용한 짤에서 따온 제목이다. 이 짤은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라는 멘트에 오은영 박사님의 이미지를 합성한 것으로, 트위터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본문에서 울면서 달린다는 내용이 있어서 떠올려봤다. 좌절과 울분을 쏟아내고 나서, 자신의 하루를 책임지는 태도가 단단하면서도 희망적이라 맘에 든다. 그러나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익숙한 인상이 독이 될 수도 있다. 고유한 느낌이 부족하다. 보류.
<매일 지는 경기에 나가는 기분>은 내가 가장 공감하는 제목이다. 본문의 “매일 지는 경기에 나가는 기분이지만, 매일 링 위에서 서야 하는 모든 사람을 응원한다.”는 문구에서 따왔다. 그러나 너무 부정적이라 팔릴지 고민이다. 누가 열패감을 돈 주고 사고 싶을까? 보류.
<부정적인 사람의 응원법>은 핵심 관계자들이 지지하는 제목이다. 저자와 저자 친구, 신문의 연재 담당 편집기자도 이 제목을 꼽았다. 그런데 한 눈에 이해가 안 간다. 누군가는 궁금해서 책을 펴볼 수도 있는데, 누군가는 어려워서 그대로 지나칠 수도 있다. 약간 자기계발서 같기도 하고. 본문에 가장 근접하지만, 대중적이지는 않은 제목. 보류
도대체 기획회의만 몇 번째냐
이 괴로움을 안고 나와 머리를 맞대줄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디자이너다. 표지 발주를 해야 하는데 제목을 못 정해서 머리를 쥐어뜯는 나를 보고, 북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했다.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는 어때요? 무슨 뜻인지 가장 쉽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카피 같아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는 저자가 프롤로그에도, 프로필에도, 본문에서도 반복하는 문구다. 어떤 단어랑 붙이든 조합도 괜찮아서, 제목을 뭘로 하든 책에 홍보용으로 두르는 띠지 문구로 쓰려고 일찌감치 정해뒀다. 그러고 보니 후보에도 없는 이 문구를, 제목으로 제안한 사람이 몇몇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나는 어쩌면 보석을 발 아래 두고도 못 알아보고 차고 다녔던 것은 아닐까?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백 퍼센트 확신이 들지는 않는다. 제목으로 두 문장을 써본 적은 없는데…임팩트가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제발 누가 나 대신 제목을 지어줬으면 좋겠다.
정답은 본문에 있다고? 본문 ‘매직아이’
지금 나는 본문을 정독하며, 괜찮은 문장을 찾아 필사하고 있다. 이연실 편집자는 책 『에세이 만드는 법』에서 말했다. 편집하기에 앞서 ‘오직 제목 짓기만을 위한 일독’의 시간을 갖는다고. 저자는 이 시간에 “책을 음미하는 데 집중”하며, “단어와 어구 단위로 문장을 쪼개가며 가급적 천천히, 깊게 읽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단어와 구절을 백지에 옮겨 적는다. 낙서하듯이 좋은 단어와 구절을 마구 흩어놓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정말로 좋은 제목이 ‘매직 아이’처럼 튀어나올 때가 있다.”는 것이다. 초심을 돌아가보자. 토할 것 같지만 다시 한 번 제목을 생각해보자.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제목을 못 정하고 고통받고 있나. 이 제목이 과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드러내는지, 더 많은 독자를 만날 가능성을 저버린 것은 아닌지, 내가 저자의 하나뿐인 원고를 사장시킬 결정을 한 것은 아닌지 고민스럽다.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어 괴롭다. 하지만 무한정 결정을 미룰 수도 없다. 시간이 오래 주어진다고 해서 좋은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능한 선택지 중 내 선택이 최선이라는 판단이 들 때까지 충분히 숙고했기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망설임이 악 중에서도 최고의 악이기 때문에, 또 사실상 모든 가능성을 검토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다.” -『노력의 기쁨과 슬픔』, 울리비에 푸리엘
그렇다. 망설임은 최고의 악이다. 나는 가지 않은 길을 내다보고 모든 가능성을 다 검토하며,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정답은 없다. 오로지 선택만이 있을 뿐. 선택하고, 결정하고, 밀고나가자. 그리고 책임지자. 내가 사장인데 내가 책임지면 되지, 뭐.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할 거야. 무엇으로 정하든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저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에도 제목을 정하기 전에 항상 5~6주 정도는 북어마냥 말라가며 괴로워했다. 어쩌면 제목을 짓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려고 이렇게 고통받는 것일지도.
남은 페이지까지만 마저 읽고, 내일은 제목을 정해야겠다. 정말이다…. 정말이라니까?
그리고.. 책 제목은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로 정해졌다고 한다.
무사히 할머니가 되고 싶은 1인 생활자의 모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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