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화 Mar 10. 2017

장기 연애의 후유증

[내 직업은 취준생 #.3] 가성비 쩌는 짝사랑  

썸 타는 법을 잊어버리다 


‘신경가소성’이라는 용어가 있다. 가소성은 뇌가 변화하는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의 뇌는 생각보다 변화에 쉽게 적응한다. 특정 자극이 반복적으로 주어지면 이를 재빨리 이어주는 신경회로가 생기는데, 오랫동안 그 자극이 주어지지 않으면 회로도 퇴화한다. 대신 다른 자극에 대응하는 새로운 회로가 생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거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 그런데 이 놈한테 오랫동안 풀만 먹이면 고기를 줘도 어떻게 씹어 삼키는지 모르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한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짝사랑이 취미가 된 이 상황을 설명하는 데는 적절한 용어인 듯하다. 


열다섯 살 때부터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을 쉬어본 적이 없는 내게는, 마음에 드는 남자로부터 고백을 받아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옆에서 알짱거리면서 그의 눈을 바라보며 웃어주고, 말도 안 되는 건수를 만들어서 밥 먹고 영화 보고 그러다보면,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뭐 다 그런 게 아니겠는가, 후후. 물론 이런 스킬이 성공률 100%를 보장하는 건 아니지만, 실패해도 곧 다른 사람이 나타나니 낙담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 장기 연애 4년 동안 그 전에 갈고 닦았던 두근두근 썸씽 만들기 연애 스킬을 잊어버렸다. 그 대신 모든 남자를 친구로 만들어버리는 쓸모없는 능력을 획득하고 말았다. 내 뇌의 신경가소성은 필요 이상으로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CC였다 


학부 선배였던 구 남친은 나의 ‘아는 오빠’ 리스트를 줄줄 꿰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인간관계 반경이 훨씬 넓었고, 한 다리만 건너면 내 지인을 모두 알 수 있는 위치였다. 나는 유리벽 같은 그 상황이 두려웠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지금까지 쌓아온 관계를 끊을 수도 없는 노릇. 과 동기․선배․후배 불문하고 모든 남자에게 철벽을 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나는 ‘여자’가 아닌 여자‘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기본적으로 시니컬한 분위기에, 벌처럼 날아서 나비처럼 아픈 곳을 쑤시는 ‘디스’를 주 무기로 활용했다. 그런 내가 편했는지 남자들은 종종 내게 연애 상담을 하곤 했다. 내 마지막 멘트는 주로 이랬다. “에휴…이 병신 같은 걸 불쌍해서 어쩌냐. 넌 이러니까 안 되는 거야. 술이나 마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이 간혹 있었다. 그런 분들에게는 마지막 필살기로 내 남친 자랑을 늘어놨다. 철벽은 습관이 되어갔다. 


주변 남자들은 이렇게 시니컬하고 철벽같은 여자랑 만나는 내 남친을 불쌍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오죽하면 나의 데이트 장면을 목격한 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눈이 반달이 되가지고 남친 팔에 매달려서 가던데? 너도 여자였어. 다행이다….” 그와의 연애 4년. 아는 오빠 리스트는 더 이상 추가되지 않았고, 아무리 휴대폰을 뒤져도 설레는 번호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누구에게도 절대 여지를 남기지 않는 무적 ‘철벽녀’가 됐다.

 

그리고 그와 헤어진 지고 나서 4개월 째, 나는 짝사랑이 취미인 찌질이가 돼 버렸다. 


영화 <음치 클리닉> (2012)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와는 사계절을 네 번이나 함께 보냈기에 추억할 거리가 무궁무진했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길을 걷다가도 구 남친 생각, 낙엽을 봐도 구 남친 생각, 맛있는 음식을 봐도 구 남친 생각….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웃음 짓다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짓기를 여러 날. 어느 순간, 구 남친을 닮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혼란스러웠다. 내가 벌써 누군가를 좋아해도 되는 건가? 안 돼. 그 사람이 슬퍼할 거야. 애써 두근거리는 마음을 참아가며 추억 팔이에 몰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구 남친은 새 여친과 이미 결혼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고 한다….)



널 좋아하는 '내'가 쪽팔려서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연애 유전자가 미친 듯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괜찮은 남자들이 꽤 있었다. 물론 예전부터 인류애적인 관계를 형성해온 사람들이긴 하지만 혹시 남몰래 내게 연정을 품고 있는 남자가 하나쯤은 있을 수도 있겠지? 라고 생각했다. 안일한 발상이었다. 


오히려 나 혼자 가슴 설렌 적은 있었다. 그런들 어쩌랴. 철벽이 그대로 인 걸. 눈을 맞추고 예쁘게 웃어 보이는 방법 따위 잊어버린 지 오래다. 관심 있는 남자한테 “병신” 따위의 언사를 남발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면, 정말이지 병신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철벽 따위 나도 벗어버리고 싶다. 그런데 취업 준비생인 내 상황이 그걸 방해하고 있다. 친구들은 착착 커리어 쌓아 연봉 몇 천씩 받는 이 시점에, 돈 한 푼 안 벌고 공부하고 있는 내가 무슨 낯짝으로 연애를 시도할 수 있단 말인가. 하루 24시간 공부만 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망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 엄마가 알면 바로 등짝 스매싱이다. 


게다가 학생도 아닌 것이 학생 코스프레를 하며 도서관에서 쭈글이 패션을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내게 호감을 느낄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나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낼 자신이 없다. 상황 자체보다도 의기소침한 마음 때문에 연애를 할 수 없다는 거 - 나도 잘 안다. 그래서 주변에 취업준비생 커플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는데, 저들은 도대체 무엇을 나누고 있는 걸까? 그래, 그게 사랑이겠지. 안타깝게도 나는 그럴 용기가 없다. 이 나이에 취업준비생인 것도 쪽팔린데, 거기에 철벽까지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남자에게 다가가려는 건 더 쪽팔린다. 


그래서 나는 취미로 짝사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돈도 안 들고, 까일 염려도 없고, 데이트할 때 뭐 입어야 하나(어차피 고를 옷도 없다) 걱정할 필요도 없는 짝.사.랑. 


영화 <호타루의 빛> (2012)


열대어 키우는 심정으로 관심남들을 므훗한 마음으로 관찰하기를 여러 날. (아무도 내 어장에 들어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내 상상의 어장이다) 유독 한 열대어가 자주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모로 내 이상형에 가까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에게 빠져 있었다. 진지한 눈빛에 중저음 보이스를 가진 그가 나를 살짝 스치기만 해도 종일 기분이 좋아서 붕붕 떠다녔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그가 생각났다. 나는 내가 외로운 나머지 미쳤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으로부터 아무런 신호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나 혼자 이렇게 좋아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이해가 안 가서 더 철벽을 쳤다. 댐이 무너지면 고여 있던 물이 와르르 쏟아지듯, 철벽이 무너지는 순간 내가 무슨 행동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 가끔 문자라도 하나 보낼라치면 몇 시간 동안 멘트를 생각해내고, 단 둘이 조금이라도 말을 섞었다 싶으면 친구들에게 이 상황은 뭐냐며 조언을 구했다. 아무래도 상대방한테 표현을 못하니까 증상이 점점 심해지는 것만 같다. 내 하소연에 지친 친구들은 급기야 이런 조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손은 잡았냐? 포옹은? 키스는?… 야, 도대체 뭘 한 거냐? 내 친구들은 이제 잔 거 아니면 말도 안 꺼낸다. 뭐라도 하고 물어봐라.” - 27세 S양 

“초딩이냐.” - 30세 K군


맞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 나이에 걸맞지 않는 행동이다. 결혼해서 2세 계획 세우는 친구들도 있는데 나는 초딩도 안 할 법한 고민을 하고 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건넬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꼴이라니! 이러다 손수 구운 쿠키라도 내밀며 연애편지로 고백하고 도망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내게 연애 조언을 들어왔던 친구들은 이제 거꾸로 내게 안쓰러움과 비웃음이 섞인 조언을 해주고 있다. 


갑자기 이 시가 떠오른다. 


어쩌다 당신을 스쳐. 
보라. 이 참혹한 형상을.   

- <짝사랑> By.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교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머릿속으로 수많은 시나리오를 그려본다. 그의 주머니 속에 따뜻한 캔 커피를 넣어주고 싶다. 비록 손을 잡아주지는 못하지만 꽁꽁 얼은 두 손을 녹여줄 수 있다면. 날이 따뜻해지면 한강에서 같이 자전거를 타고 싶다. 어떻게 단체로 물타기 해서 데려 갈 순 없을까. 망상에 빠진 나 자신을 보면 진심으로 미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누군가 내 등짝을 크게 휘갈기며 정신 차리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ㄸㄹㄹㄹ...


이제 작업 스킬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게 다 망할 놈의 신경가소성 때문이다. 그래도 세월이 바꾸지 못한 게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그 마음 하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다. 나는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나도 이런 내가 부담스럽다. 할 수만 있다면, 냉장고에 심장을 넣어서 얼려두었다가 취직한 이후에 꺼내서 해동시키고 싶다. 


올 겨울은 유난히 긴 것 같다. 




*2013년 월간잉여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미운 청년 새끼’라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