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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Apr 19. 2017

내가 ‘미운 청년 새끼’라니?!

[리뷰] 열받아서 술 땡기는 '망가진 나라의 청년 생존썰'을 읽고 

남산 타워 아래로 주황빛 노을이 내려앉았다. 아랫동네 명동에는 최신식 건물로 가득하다. 그중 키 높은 건물 옥상에 한 청년이 서 있다. 삐죽 솟아나온 기다란 널 위에서 이 청년은 아무런 보호 장구도 없이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체크셔츠에 청바지, 캔버스를 신고 있는 이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이다. 체념한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하다. 화려한 건물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를 보아하니, 취준생이거나 인턴인 듯하다. 


청년은 생각한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언론에서는 헤드라인을 뭐라고 뽑아낼까? 무기력한 N포 세대의 자살? 달관 세대, 삶까지 달관하다? 상관없다. 당신들은 지금껏 그래왔듯, 이 하나의 포즈에서 엿보이는 좌절, 무기력, 달관마저 트렌드로 분석하며 대상화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세대로 정의하자마자, 이들은 또 다른 삶의 결을 서사화하며 그 구멍을 빠져나간다. 좀처럼 기성세대의 정치적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거대한 서사에 균열을 내며 제멋대로 살아가는 ‘미운 청년 새끼’의 탄생이다.  


 

‘망가진 나라의 청년 생존썰’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의 표지에 담긴 스토리를 상상해봤다. 특히 나는 이 표지에서 청년의 대표격으로 그려진 이가 여성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지금까지 내 책꽂이에 진열된 세대론 책들은 모두 남자들이 쓴 것이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잉여 사회』, 그리고 물건너 온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까지 글쓴이는 모두 남성이다. 이 책들은 내게 시원함과 함께 어떤 갈증을 동시에 안겼다. 이들이 설명하는 것이 세대론의 보편이라면, 여성으로서의 경험은 어떤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는가. 세 명의 여성 저자가 함께 쓴 세대론 책 『미운 청년 새끼』는 이에 대한 첫 번째 답이 될 것이다. 



메뚜기는 한 철이라지만 

우리는 사시사철 이주를 준비한다 


이 책에는 내밀한 경험의 결이 살아 있다. 읽다 보면 이게 내 얘기인가, 옆에서 친구의 술주정을 듣고 있는 것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만큼 공감하기도 쉽다. 특히 ‘이직의 여왕’을 자처하는 저자 김송희가 쓴 글들이 그러하다. 잡지사 인턴을 거쳐 홍보대행사, 기업 홍보팀, 웹진과 잡지사의 상근 프리랜서를 거쳐 현재 《캠퍼스 씨네 21》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울컥해서 자꾸만 술이 당긴다. 회사는 근로자에게 열정과 헌신을 요구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안정적인 지위, 보수를 보장해줄 마음은 없다. 그래서 ‘상근 프리랜서’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직함을 갖다 붙인다. 헌신을 다해 일하다가는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안 뒤에야, 그녀는 종횡무진 이직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조직이 나를 배신하기 전에 내가 먼저 조직을 배신하는 것, 그것은 망가진 나라의 청년이 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생존 방식이다. 


주기적으로 삶터를 바꿔야 하는 생존전략은 주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저자는 기숙사에서 고시원으로, 고시원에서 룸메이트와 함께하는 반전세로, 여기서 혼자 월세집을 살기까지 조금씩 업그레이드 해 왔다. 이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어 더 슬프다. 어떤 독자는 “주거 편을 읽고 두 번이나 울었다.”고 한다.(알라딘 ID: jung) 아마 자신의 경험과 만나는 지점이 있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제3자의 시선에서 섣부른 동정은 사양한다. 고시원 안에서도 소소한 즐거움이 있고, 낯선 룸메이트의 고양이가 가져다준 몽실몽실한 위로가 있다. 〇〇 세대라는 정의 안에 이 경험의 결들을 뭉개버리고, 피해자 서사로 완결시키는 것은 대상화라는 또 하나의 폭력일 뿐이다. 



달관세대? 

너부터 달관하세요


앞에서 김송희가 증언자 역할을 했다면, 뒤에서는 최서윤이 스웩 넘치는 논객으로 나선다. ‘너부터 달관하세요.’, ‘취존과 취좆’, ‘2030여성을 무시하면 아주 좆되는 거야.’하는 제목들이 예사롭지 않다. 《월간 잉여》 편집장이자 「수저 게임」을 만든 최서윤은 ‘N포 세대’로 명명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전하며 ‘달관 세대’ 논의를 공격한다. 일본의 ‘사토리(깨달음) 세대’를 본따 만든 이 네이밍이 실은 “일본과 한국의 고용과 복지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그저 한국 청년들이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든 즐겨보고자 하는 분투를 멋들어진 트렌드인 양 포장한 보도를 보고, 속으로 가장 흐뭇해했을 이들은 기득권층”이 아니냐고 일갈한다. 통쾌한 지적이다.

 

이 외에도 곱씹어 볼 만한 통찰들이 곳곳에 가득하다. 특히 수저 게임에서 드러난 현상을 분석한 글이 흥미로웠다. 게임에서 금수저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면 흙수저들끼리 연대하지만, 금수저가 의료비를 지원하는 등 복지를 제공하면 체제가 더 공고해져 결국은 ‘착한 금수저’라는 칭송까지 받으며 승리한다는 것이다. 대선 후보들이 너도 나도 복지를 외치는 시대에(물론 홍준표는 아니지만) 복지가 과연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조건인지 고민하게 한다.     



사랑, 

한없이 낭만에 가까운 기만에 대하여 


여성 저자들이 나섰으니 페미니즘을 빼놓을 수 없다. 비연애를 사유하는 독립잡지 《계간 홀로》를 만든 이진송은 낭만에 가려진 사랑의 실체를 분석한다. 대중문화와 자신의 경험을 재료로 사용하며, 연애와 결혼 안에 깃든 이데올로기와 차별, 혐오를 읽어낸다. 전개 방식이 논리정연하고 말투마저 다정하다. 나는 이런 글들을 보며 생각한다. 연애 안 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이며, 여성도 동등한 인간이라는 당연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친절해져야 하는가. 저자는 툭하면 된장녀니 김치녀니 여자를 분류하고 평가하기를 일삼는 남성들을 위한 너그러운 초대도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내가 김치녀가 아니라는 항변에 목매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소위 된장녀, 감장녀, 김치녀, 개념녀의 속성들이 모두 조금씩 깃들기 때문이다. (중략) 한껏 꾸미고 싶은 날에는 된장녀 도감에 나온 것처럼 드레스 업하고, 편하게 다닐 때는 간장녀처럼 운동화를 신고 봉지를 덜렁거리며 장을 본다. 물론 저 된장녀 도감에서 된장녀는 밥은 굶어도 밥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는 허영의 아이콘이지만, 신상 백과 구두를 소유한 여자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밥을 굶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도감을 그린 사람은 모르겠지. 
그러지 말고 나와서 바람도 좀 쐬고, 현실 여자도 좀 만나보고, 들어가는 순간 폭발하거나 “삐삐! 들어올 수 없는 닝겐입니다!” 경계경보 따위는 발령되지 않으니 스타벅스도 좀 들어가 보고, 뭐 그랬으면 좋겠다. 거기 호갱 중에 ‘다른 성별’도 많은데. 남들의 소비를 사치라고 폄하하고 비난하면서도 그런 여자를 욕망하고, 그래서 가방을 사준 적도 없으면서 가방 사달라고 하는 여자친구를 원망하는 것보다는 소소한 금액으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넓힐 수 있는 생활과 경험들을 발견하는 게 훨씬 재밌으니까. 이제 그만 발효식품을 좀 놔주고, 인간으로서의 여자와 인사하자. - ‘이제 그만 발효식품을 놔줘.’ 299쪽


저자들이 그려내는 현실은 역시나 시궁창인데, 책을 덮을 때쯤 의외로 희망이 보인다. 침묵보다는 표현을, 타협보다는 개김을, 무기력보다는 분노를 택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된다. 그리고 그게 같은 여성이라 더욱 반갑다. 그녀들은 ‘파도가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며 사소한 문제로 치부돼온 것들을 세대론 안으로 끌어들인다. ‘꼰대’들이야 뭐라고 하든 제멋대로 살면서 나름의 대안을 찾는 사람들. 이들은 정의당하는 것부터 거부한다. 일단은 삶의 결부터 제대로 들여다보고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를 하는 것이 청년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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