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자들의 한뼘 투쟁, 출근길 만원 지하철의 슬픔
서울은 여백이 없다. 하늘도, 거리도, 그리고 지하철도 모든 공간이 빽빽하다. 사무실을 포함, 어딜 가도 바쁘고 우글우글 미어터지는 사람들이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자네가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하는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 보게. 그럼 잠깐이라도 자리를 내 주지.” 휴가로 다녀왔던 제주도에서는 바람이든 바다든 내게 방문의 이유를 묻지 않았는데……. 그래서였을까. 휴가를 마치고 출근하는 날 아침, 신림에서 강남 가는 지하철 2호선 구간에서 나는 문득 서러워졌다.
출근 첫날, 지하철 한 대를 그냥 보냈다. 무서웠다. 까만 머리들로 바퀴벌레처럼 가득 찬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 나를 달래 본다. 왜 이래, 나는 몇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 보겠다고 3년이나 언론 고시를 보던 사람이야. 이 정도 가지고 뭘. 호기롭게 다음 지하철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분명 신림역까지 인구밀도가 한계치라고 생각했는데, 봉천·서울대입구·낙성대역까지 사람들이 계속 밀고 들어왔다. 기세가 하도 맹렬해서 어디 피난이라도 가는 줄 알았다. 다행히 사당역에서 우르르 빠지기에 이제 좀 살았다 싶었는데 빠져 나간 머릿수보다 더 많은 인간이 다시 밀고 들어왔다. 아무래도 지하철 2호선은 철이 아니라 고무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지하철 안에 사람이 포개지는 데는 암묵적인 공식이 있다. 지하철 칸의 의자와 의자 사이 공간에 사람이 품위 있게 설 수 있는 것은 딱 세 줄이다. 좌우 좌석 앞에 한 줄씩, 그리고 그 중간에 한 줄까지 합쳐서 그렇다. 이 정도 공간에서는 신문, 책, 게임, 영화 등 거의 웬만한 ‘지하철 엔터테인먼트’는 다 즐길 수 있다.
문제는 그 이상이 될 때다. 가끔 서울대입구역에서부터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하면 네 줄, 다섯 줄로 샌드위치 돼서 교대까지 가는 수가 있다. 그러면 같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을 정도로 차곡차곡 타인의 몸과 포개지는 순간이 온다. 살과 살이 맞닿고 온갖 이들의 땀내와 어젯밤 회식 냄새, 트름 사이로 삐져나오는 된장국 기운까지 모든 냄새가 합쳐진다. 어우, 여기다 누가 고구마 방구라도 끼면 그냥! 나는 지옥철에서 누군가가 방구 냄새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참고로, 한 일간지에 따르면 매일 아침 출근 시간에 신림역에서 지하철을 타는 사람은 9만 명, 강남역에서 내리는 사람은 26만 명이라고 한다.)
이럴 때는 최대한 눈앞의 현실에서 멀어지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유체이탈을 돕는 가장 좋은 아이템은 이어폰이다. 책, 게임 같은 것들은 움직임도 많고 공간을 상대적으로 많이 잡아먹는다. 그런 아이템에 푹 빠져 있다가 인구밀도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음을 제때에 눈치채지 못하면 끝장나는 거다. 지옥철의 아비규환을 있는 그대로 맨 정신으로 목격하고 나면 이미 회사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몸도 마음도 허기진 상태가 된다. 이걸 아는 요즘에도 책 읽겠다고 고집피우다가 지옥철의 현실을 강제로 목격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진짜로 유체이탈을 시도한다. 먼저 팔을 축 늘어뜨리고 눈을 감는다. 그러고는 남극의 신사 황제펭귄을 상상한다. 황제펭귄은 존경스러운 동물이다. 엄마 펭귄들이 알을 낳고 나면 4개월간 몸보신하러 떠나는데, 그 동안 아빠 펭귄들은 남아서 알을 품는다. 영하 20도, 시속 200km 칼바람이 부는 곳에서 아빠 펭귄들은 알을 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 하는 게 하나 있다. 허들링. 몇 겹으로 촘촘하게 원을 만들어서 서로를 품어주는 행위를 허들링이라고 한다. 밖에 있던 놈이 한 줄 안으로 들어가면 제일 안에 있던 놈이 밖으로 나와서 교대하는 식으로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유지해 나간다. <남극의 눈물> 다큐멘터리에서 본 그 장면을 나는 몇 번이고 곱씹으며 중얼거린다. ‘아, 우리는 지금 자리 한 뼘 더 차지해 보겠다고 몸싸움을 벌이는 게 아냐, 직장에 나가면 경쟁하느라 상처 입을 사람들을 위해 미리 허들링 하는 중이야. 실은 서로를 온몸으로 보듬어주는 거야. 황제펭귄처럼. 우리는 황제펭귄이야. 나는 황제펭귄이야…….’
하지만 이런 인류애 돋는 명상도 누군가가 나를 건드리기 전까지만 가능하다. 진짜 죽겠다 싶을 정도로 압박이 심하면 욕이 터져 나오고 싸움이 날 때도 있다. 나도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적이 있다.
세 줄 공식이 지켜질 정도로 지하철 객실이 널널한 어느 날 아침이었다. 나는 좌석 앞줄에서 서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뒷줄에 선 어떤 사람이 자꾸 내 등짝을 간질이며 살짝살짝 밀어댔다. 돌아보니 내 나이 또래의 어떤 여자가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눈치를 준답시고 나는 몇 번 뒤를 돌아보며 헛기침을 해댔다. 이쯤 하면 알아듣고 안전거리를 확보해 주리라 기대하며 말이다. 그때 뒤에 있던 여자가 매몰차게 말했다.
“아, 지가 앞으로 가면 쫌 될 거 아냐. 짜증나게.”
지, 지? 방금 저 여자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지’라고 했다. 심지어 말도 놨다! 꺼져가는 정신의 퓨즈를 부여잡으며 나는 낮은 목소리로 답변했다.
“자리 없는데요.”
최대한 신사적인 멘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도발은 계속 됐다. 조금만 돌아서면 되는데 버티고 서서 휴대폰으로 계속 내 등을 밀쳐댔다. 나도 복수한답시고 소심하게 백팩을 휙휙 고쳐 매길 여러 차례. “아, 짜증나 미치겠네.”라며 말하며 몇 번 째려보기도 했다. 나이도 비슷한 주제에 나를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서 속에서는 자꾸 천불이 났다. ‘네가 뭔데 나한테 반말을 해? 사과해. 나한테 사과하란 말이야!’ 마음의 소리가 생중계 됐는지, 그 여자는 뒤에서 ‘쯧쯧쯧’ 하고 혀를 차더니 바로 한 정거장 앞에서 내렸다. 약이 바짝 올랐다. 저게 날 우습게 보는 게 틀림없다. 뒤 따라 내려서 머리 끄댕이를 잡아채서 그대로 지하철 승강장에 내리 꽂을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곧 침울해졌다. 낯모르는 타인으로부터 막말 한마디 들었다고 때릴 생각을 하다니……. 황제펭귄은 무슨, 얼어 죽을
익명의 군중에 대한 분노. 나는 어쩌다 자리가 좁다는 사실만으로도 쉽게 분개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나. 변명하자면, 화살을 많이 맞아서 그렇다. 회사에서 각종 갑들한테 총알받이가 되어 살다 보니 인성이 개차반이 되어가고 있다. 갑들의 세계에서 침묵하던 을의 분노는 그런 순간에 폭발하는 것이다. 체급이 비슷해 보이는, 싸워도 손해 보지 않을 것 같은 약자에게. 어쩌면 그런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건드리기만 해 봐,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야 하는 독기로 무장하고서 말이다. 그래, 인정한다. 센 놈한테는 못 덤비니까 비슷한 사람한테 화살을 뽑아 돌려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은 사람들이 나를 미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서 화가 날 때도 있는 법이다.
아침마다 만원 지하철을 타고 나면 온몸이 욱신욱신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닿아서 괴로운 건 살갗이 아니라 살기다. 우리는 건물로 빽빽한 신림에서 자기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해, 사무실로 빽빽한 강남으로 매일 아침 출근해 자기 책상을 보전하려 애쓰는 인간들이다. 아파도 참고, 모욕을 당해도 참고, 배신을 당해도 참아야 한다. 경쟁자는 밀치고 권력자에게는 잘 보여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그 지긋지긋한 생존 공식이 지하철에서는 육화되어 재현되는 것이다. 만원 지하철에서 내리면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다. 없는 사람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장소라서 속이 더 상한다. 신림에서 강남 가는 지옥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