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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나라는 왜 자살공화국이 되었는가?

경제 성장률은 속보(速步), 삶의 질 상승은 답보(踏步)

by 오로지오롯이


또 1등이다. 십여년 동안 한 번도 놓치지 않았으니, 이쯤 되면 우리나라는 분명 이 분야에서 전통의 강호다. 스포츠 성적이나 인터넷 보급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자살에 대한 이야기이다. 2023년 OECD가 발표한 가입 국가 자살률에서 우리나라는 10만명 당 27.3명으로 자살률 1위로 조사되었다. 이는 OECD 가입국 평균인 10.7명의 두 배를 가뿐하게 뛰어넘는다. 또한 우리나라 전체 국민의 사망 원인 중 자해로 인한 사망이 암, 심장질환, 뇌혈관 질환에 이어 4위를 치지했고, 세대의 범위를 10대에서 30대로 좁혔을 시에는 제 1위 사망원인이 바로 자살이다.


물론 자살률이 높아진 계기에는 동의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끝없는 경제 고성장을 이룩하다가 IMF 경제위기라는 전에 없던 암초를 만났다. 그 이후 회사들의 감원 태풍이 일었고, 실적 중심의 평가 하에 노동의 강도가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잔재해 있는 해고의 공포로 직장인의 스트레스 또한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자살은 바로 생계위협과 가족해체, 실직과 스트레스에 내몰린 사람들의 극단적인 탈출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우리 민족 특유의 기지를 발휘해 5~6년 만에 위기의 국가를 다시 세계 경제 시장의 수면으로 띄어 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2004년부터 경제성장률은 다시 탄력이 붙기 시작했고, GDP는 2004년부터 2015년까지 7600억$에서 14500억$로 약 2배 증가했다.


또한 같은 시기 1인당 국민소득도 15800$에서 30000$까지 약 2배 증가하였고, 외환보유고와 화폐통화량도 약 2배가 증가했다. 우리나라가 아니었다면 그 어떤 나라도 이루지 못했을 뛰어난 경제 위기 극복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곁에서 조용히 목숨을 내놓던 사람들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어느 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알아주는 자살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그 시기 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것일까.


최근에는 덜한 듯하지만, 201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를 일컬어 이른바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여 유행했었다. 지옥을 뜻하는 ‘헬(HELL)’과 조선 말기처럼 희망이 안 보인다는 의미가 합쳐서 대한민국을 지칭하는 자조적인 표현이 된 것이다. 지독한 취업난과 거주난, 대다수가 5포 세대가 될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이 담겨 있는 어휘이다. 이는 우리나라 삶의 질의 지표와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젊은이들의 이유 있는 항변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삶의 만족도 지표 34개 회원국 중 26위에 불과하다. 또한 정부의 공공지출은 가장 낮으며, 출산율, 이혼율 등 가족 공동체적 지표 역시 최악인 수준이다. 근로자의 노동시간은 가장 길지만, 노동생산성은 최하위권이다. 노인빈곤율 1위이며, 청소년 행복지수 최하위, 가계부채, 소득불균형, 부의 편중비율, 고용불안, 비정규직 비율 최상위…. 다 나열하기도 민망한 수치이다. 나라의 경제를 살려놓는 동안 왜 개개인은 죽어가고 있어야 했을까.


경제성장률은 나라 전체에 대한 지표에 불과하다. 현재 가계부채는 약 1100조 원으로 2004년의 약 490조 원에 비교하면 두 배를 웃돌고 있다. 또한 정부와 기업, 국민이 한 해 동안 벌어들이는 국민총소득, GNI에서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것이다. 최근 5년간 평균 25%를 넘는데, 이는 OECD 평균보다 7%포인트 높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기업이 가장 돈을 잘 벌어들인다는 얘기인 것이다. 즉 우리는 경제를 성장시키면서 사회 불균형을 해소시키지 못했다. 위와 같은 부정적 삶의 지표들은 높은 자살률과 밀접하게 연관될 수밖에 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다른 부분들이 변하지 않는 한, 자살률만 특별하게 낮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이라는 자신의 연구 저서에서 ‘사람들이 경제 부흥보다는 경제 위기 때 훨씬 자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착각’을 엄격한 자료의 비교와 분석을 통해서 바로잡아주었다. 자신의 조사를 바탕으로 경제 위기 때와 경제 부흥 때의 유럽 각국의 자살률을 비교했는데, 그 결과는 예상외로 비슷했다. 그는 산업이나 금융 위기가 자살을 증가시키지만 갑작스러운 번영도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했다. 즉 자살은 빈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변화와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사회의 집단적 질서를 잡아줄 수 있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그것이 없는 것이다. 결국 한 나라의 정책적인 목표는 경제수준이나 경제성장의 속도에 관계없이 국민의 삶을 유지하여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있어야 한다. 조정의 역할은 사회만이 할 수 있으며 사회 전체가 직접 하거나 사회의 어떤 기구를 통해서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인보다 우월한 정신적 힘이며, 개인이 존중하는 권위를 갖기 때문이다. 사회만이 법을 규정할 수 있으며, 사회만이 개인의 욕구가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설정할 수 있다. 또한 사회만이 공공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계층의 구성원들에게 앞으로 제공할 보상수준을 정할 수 있다. 자살을 하고자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가는 사회의 그 어두운 곳에서 조용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예비 자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


대표적으로 유럽과 일본에서는 치솟았던 자살률을 낮추는 노력을 구체적으로 실시했다. 이는 정부 차원에서의 실업률 감소 프로젝트와 캠페인 진행으로 인한 경제적 스트레스 감소, 정책 과정 측면이 아닌 실질적인 국민 건강의 향상, 즉 결과 측면의 목표 설정이었다. 특히 영국 정부는 자살률이 떨어진 지금까지도 노력하고 있다. 광범위한 인구 집단의 정신적 안녕을 증진시키려 정신 건강의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업, 주거 등의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정부 간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자살률을 바로잡은 사례는 충분히 있다.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이 정말 헬조선이라면 이루지 못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다양한 인프라를 이용하여 자살률 감소를 증명해보일 때가 되었다. 우리는 응집력 있고 활력 넘치는 민족이다. 그런 민족은 국가의 조그마한 도움으로도 모든 성원들 간에 끊임없이 관념과 정서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 IMF를 이겨냈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왜 이리 오래 끌고 있는가. 벌써 십여년이다. 이 문제가 계속된다면 개인의 ‘자살’이 아니라 국가의 ‘살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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