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 분석
이 저서는 전체적으로 느꼈을 때 어떤 마음가짐에 관한 책이다. 그것은 시인의 마음가짐일 수도 있고, 독자의 마음가짐일 수도 있다. 시인이든, 독자든 시에 관한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시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로서의 마음가짐도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그의 이야기를 읽어 내리면서 독자와 시인의 마음가짐을 모두 생각할 수 있었고, 그 마음가짐을 가슴 넓게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가짐으로 독서를 진행했다. 그 결과 이 책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혀질 책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어쩌면 수용적으로 읽은 이 책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분석이 아닌 감응의 독서
공간의 시학은 시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책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보다는 시의 총체적인 인식론에 가까웠다. 또한 철학서처럼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사색과 지식이 뒤따라야 하는 책이었다. 일반적인 지식으로는 어려움이 분명 있는 책이라 큰 부담 없이 읽어 내린 듯하다.
시의 존재론과 인간의 자유
바슐라르가 말하는 시의 주된 기능은 우리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감동, 즉 감정의 움직임과 울림이다. 이 책은 시가 그런 울림을 가지기 위하여 시인이 가져야 할 태도와 시인이 표현해야 할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는 이미지와 상상력에 관한 내용을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을 먼저 중점으로 보았다. 바슐라르는 이미지가 표현의 생성인 동시에 우리들의 존재의 생성 표현이 바로 존재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렵게 다가가면 존재론에 관한 지식과 그에 따른 철학들을 생각해야 하지만, 단순히 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지와 상상의 생성이 존재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바슐라르의 인간관이 실존주의라 말하고 있다. 즉, 실존주의적으로 바라본 바슐라르적 인간의 자유는, 우리들 각자가, 우연적으로 시공적인 좌표에 내던져져 있는 우리들의 실존에서 우리들을 해방시켜 인류의 보편적인 본질로 나아가는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인류의 보편적인 본질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시라고 유추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는 어떤 과정에서 인류를 보편적인 본질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풀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과정에서 바슐라르는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상상력과 문학과 예술, 심미적 체험이 우리들의 삶을 이끌어 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는 분명 중요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보편적인 본질이라는 것은 하나에 집중된, 그리고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본질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시는 중대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된다. 시의 존재론은 결국 인간의 존재론과 맞닿아 있으며, 인간의 자유는 시를 통해서 진정 본질적인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상념으로 이끄는 대목이었다.
상상력과 내재적 세계의 창조
그렇다면 바슐라르가 생각하는 시 예술은 무엇일까. 이 부분도 넘어갈 수 없는 부분으로 판단되었고, 그 부분도 유심히 읽어내렸다. 바슐라르는 문학 작품 하나하나가 각각 내재적인, 따라서 그 자체만이 지니는, 즉 특이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외부에 있는 세계에 대한 어떤 진리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자체가 독자적이고 특이한 세계를 이룬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분명 상상력과의 연계할 수 있는 부분으로 받아들여졌다. 독자적이고 특이한 세계를 창조한 상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일상과 현실에서 벗어날 기회를 준다. 그 기회를 통해서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본질이고, 가치일 것이다.
널리 훌륭하다고 하는 작품들은 대게 내재적인 가치와 보편적인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이런 작품들을 읽으며 본질에 대한 탐구를 조금이나마 진행시킬 수 있다. 그건 분명 현대의 문명화된 일상에서 쉽게 행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닐 것이다.
현실과 초월의 경계에서: 상상력의 이중성
그렇다면 바슐라르가 말하는 상상력이란 무엇일까. 그는 상상력의 영역에서는 일체의 내재성에 초월성이 함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단 내재성은 현실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고, 초월성은 말 그대로 현실을 뛰어넘은 세계라고 해석은 하였지만, 크게 와 닿아 이해되는 부분은 아니다.
바슐라르는 공간은 이미지들에 의해서 풍성해지고, 상상력의 범위이기도 하다고 하였는데 이 부분으로 윗부분을 생각해보면 상상력은 일상의 수많은 것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그것이 현실을 뛰어넘는 어느 지점이라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현실을 뛰어넘는 지점이 어디인지는 책을 읽는 내내 고민하였지만, 시들을 찾아보는 순간에 느낄 수는 있었다. 물론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바슐라르는 시는 상상력과 이미지의 일체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것도 위 맥락에서 이해되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상상력과 이미지는 떨어질 수 없는 상관관계라는 것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일상의 사물에서 태어나는 시적 이미지
바슐라르는 서랍이나 상자, 장롱, 새집, 조개껍질 등의 원초적 이미지를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중점은 이런 원초적 이미지는 시의 이미지를 생성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시의 이미지는 현실의 원초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이 시의 재료가 되고, 그림이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시인이 하는 상상의 개입은 시를 경이롭게 만든다. 모든 시인은 그 경이를 꿈꾸고, 그 경이는 모든 독자들을 자극한다. 즉, 이미지에 의한 상상은 시의 결정적인 부분이다. 또한 바슐라르는 시적 이미지란 갑작스러운 정신의 융기, 부수적인 심리적 인과관계로는 잘 밝혀지지 않는 정신의 융기라고도 표현하였는데 시를 쓰는 시인들의 입장에서 갑작스러운 영감이 이것과 관련 있는 것인지 하는 궁금증도 가졌었다.
바슐라르가 말한 많은 사물 중에 장롱은 추억들의 소리 없는 소란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을 하였는데, 단번에 이 말에 집중하였다. 장롱들은 약속들을 품고 있으며, 자물쇠는 비밀에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유혹적인 심리적 입구라는 말에서도 흥미가 느껴졌는데 일상의 단순한 사물을 어떻게 봐야 시적 상상력을 진행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그는 서랍, 상자 등에도 우리들의 비밀이 간직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즉, 대상들 속에 감추어진 내밀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사물들에는 우리들의 과거, 현재, 미래가 응집되어 있고, 그것은 무한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처럼 상상력이 삶보다 풍요로운 것이 아닐까.
바슐라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미지의 힘에서도 피력하고 있다. 그는 이미지의 번쩍임에 의해 먼 과거가 메아리들로 울리고, 그 메아리들이 얼마만큼의 깊이에까지 방향하며 사려져가게 되는지 우리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미지의 새로움과 약동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그 자체의 존재와 그 자체의 힘을 가진다는 그의 표현처럼 이미지, 즉 장롱, 서랍, 상자 등에 존재하는 과거의 메아리들은 시 자체를 형성하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힘으로 인간들을 흔들 수 있다. 이것은 감정의 동물인 인간에게 분명히 적용되는 부분일 것이다.
시인이 창조하는 경이와 몽상
그의 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시적 이미지들은 예측 불가능한 것이고, 느닷없는 놀라움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부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인의 역할일 것이다. 시는 끊임없이 원천을 넘어서며, 기쁨과 슬픔 속에서 더 멀리 나아가 작품들을 빚어냄으로써 더 자유롭게 있는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도 시인이 가져야 하는 마음과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집이라는 공간의 시적 상상력
그는 집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집은 인간의 사상과 추억과 꿈을 한 데 통합하는 가장 큰 힘의 하나이고, 이 통합의 연결의 원리는 몽상이라고 말한다. 집이 없다면 인간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릴 것이라는 표현까지 서술한다. 이런 말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위치가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비추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집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오래 있고, 가장 친근하며, 편안한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공간이든 편하게 느껴지면 집 같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해도 집에는 모성이 있고, 부성이 있으며, 그것은 뿌리이고, 그 위로 태어난 존재들은 나무이다. 뿌리가 있는 곳에 나무가 있는 것이 어쩌면 가장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또한 집은 쉬는 공간이고, 쉬다 보면 상상하거나, 추억하거나 하는 몽상의 체험을 할 기회가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말대로 집은 상상되는 것이 너무 많고, 집 자체로서도 하나의 상상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집을 수직적인 존재로 보면 위와 아래, 지하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해낼 수 있고, 집을 응집된 존재로 본다면 영혼의 안식처, 다시 돌아오는 회기의 공간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층계는 어린 아이의 음계연습의 공간이 되기도 하는데 이런 집의 공간은 다른 세계로 인식할 수 있는 상상의 공간이다. 그리고 지하실은 어둠이 밤낮으로 머물러 있는 곳으로 시간성이 결여된 공간의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다. 바슐라르는 어떤 시를 예로 들고 있는데, 그 시 구절은 “돌의 사면 벽 사이에 / 갇힌 시선.”이라는 표현이다. 시선은 집안의 벽을 뚫지 못하고, 집 안에서 맴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시선은 화자 자신이기도 하다. 이런 단편적인 표현을 비추어볼 때 집안 다른 곳을 다른 방향으로 생각한다면 집안에서 생성되는 이미지와 상상은 무한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달팽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달팽이들은 조그만 집을 지어, 그것을 지니고 다닌다. 달팽이는 어느 곳을 돌아다니더라도 언제나 제 집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조개껍질도 마찬가지이며, 그것은 파괴되지 않은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이미지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너무 분명하게 드러내면 진부한 이미지의 희생이 되며, 이미지를 생동케 하기 위해 특수한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고독과 무의식의 장소 분석
이렇듯 장소 분석이란 우리들의 내면적인 삶의 장소들에 대한 조직적인 심리적 연구일 것이다. 바슐라르는 무의식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큰 추억들을 비사회화하여, 우리들이 우리들의 고독의 공간들 속에서 가졌던 몽상들의 차원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무의식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전혀 사회적이지 않은 차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처럼 시인은 깨어 있는 몽상을 사는 것이며, 특히 그의 몽상은 세계 속에서, 세계의 대상들 앞에서 머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 주위에, 하나의 대상 속에 우주를 모으는 것이 아닐까.
시와 현실 사이의 몽상적 감각
바슐라르는 또 시는 밤에 꾸는 꿈보다 자기주장을 덜하는 몽상에서 태어나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시는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 공상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만약 다시 집을 예로 든다면, 집은 불안의 흔적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이 불안이라는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집은 그대로 존재하여만 한다. 집으로 인한 불안을 표현할 때 집(현실)이 존재하지 않고, 불안의 공상 세계만 펼쳐진다면, 누구도 집의 불안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 단순하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중요한 부분이다. 단순하고 위대한 이미지라면 어떤 것이나 하나의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게 마련이기 때문에 시인은 어떤 이미지로 인한 상상에서 어떤 이미지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 물론 그것이 어떻게 변형되든지 말이다. 그래서 바슐라르는 일상의 것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바슐라르의 말대로 상상력은 주어진 것 이상의 것을 만들어내는 여정이다. 상상력은 끝없는 것이기에 끝없이 상상해야 한다. 그래야만 끝없는 가치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끝없는 창조 작업을 학습해야 할 것이다.
도시 문명 속에서의 시적 저항
이 책은 분명 도시의 수많은 문명인에 대한 아쉬움을 담고 있다. 도시의 문명인들에게는 불만족과 소외가 가중된다. 그리고 자신의 일상과 삶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바슐라르의 아쉬움 때문인지 자본주의와 관련해서 바슐라르의 이야기가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세밀한 것에서 무한한 것을 상상해낼 수 있는 있다는 바슐라르의 말에서 그가 낭만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말하는 이미지는 우리가 살고 쉴 수 있는 이미지, 즉 행복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를 통해 구현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내가 가질 수 있는 확신이었다.
우리는 분명 범람하는 이미지, 시뮬라크르 속에 살고 있으며, 과잉 소비, 소모되고 있는 여분의 것들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그런 것에 적응을 하고 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문명화된 주변 환경과 가까워지고, 더 나아가 친숙해지고 있다. 이렇게 어떤 것과 친숙해지면, 그것들을 자연스러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마치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날마다 TV 속 광고를 보고, 또 극장에서 흥행 영화를 보고, 고음질의 스피커로 최신 가요를 듣는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친숙한 것들이다. 그렇게 주변과 친숙해지고 주변에 길들여지며 자라왔다. 하지만 그 친숙이라는 단어 뒷면에는 깜짝 놀랄 만한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우리는 대부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내왔지만, 바슐라르 같은 사람들은 그것을 통찰해내는 관찰력과 분석력이 있었다. 우리한테 시급한 것은 헛된 허영과 소비적, 쾌락적 일상을 버리고 일상의 본연으로 들어가는 과정일 것이다. 현대인으로서 살아가는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 성찰을 도와줄 저서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공간의 시학이 아닐까 싶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상상하기
일상의 현실은 살아서는 우리가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곳이고,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그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낡은 가구는 분명 경제적 가치가 높지는 않다. 하지만 바슐라르의 말처럼 잠들어있는 가치를 깨운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세계가 된다. 아주 사소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을 따뜻하게 품고 있으며 그곳에서 삶의 행복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일상적인 것, 우리가 하찮고, 의미없는 것으로 막연히 규정한 그것을 바슐라르는 새삼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새로운 대상으로 승격시키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시를 직접 보여주며, 바슐라르 자신이 이야기한 것이 시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한 예시를 제시하며, 우리가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의 책에서 한 번에 다가오는 구절도 있었고, 읽다보니 공감되는 구절도 있었으며, 아예 이해되지 않은 구절도 있었다. 허나 가슴 깊이 다가온 것은 일상의 모든 소재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과 모든 사물에 투여하는 인간의 상상은 현실의 감옥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라는 것이다.
시적 상상력, 삶의 본질에 닿는 통로
어쩌면 단편적인 해석을 가지고 이 책을 감상하였는지도 모른다. 마음에 다가오는 구절에만 밑줄을 쳐가며 읽어서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허나 바슐라르가 강조하는 마음가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시인으로서, 독자로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 가져야 할 근원적인 책임이었다. 상상력은 두 세계를 동시에 넘나들며 매개하고, 표면이 아닌 깊이를 통해 일상적인 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말이 아직도 머리에 맴돈다. 일상적인 것을 가치 있게 만드는 과정에서, 시를 쓰고 읽는 과정에서 바슐라르의 말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이 빨리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시간과 공간의 시학, 그 너머를 꿈꾸며
공간의 시학이 있다면, 시간의 시학도 있을 것이다. 물론 바슐라르가 말한 이미지에는 시간은 크게 개입되지 않는다. 허나 독자들은 시를 읽으면서 시간성을 파악하는 일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으며, 시 전체를 두고 봤을 때에는 시에서의 시간성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전체적인 시학의 범위로 볼 때 공간의 시학은 한 부분에 집중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시는 언어가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의 언어가 우리를 꿈꾸게 한다. 공간의 시학에서 가장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 책을 통해 얻은 것들로 살아가는 노력이 필요할 듯하다. 작은 것 속에 있는 큰 것을 체험해보기 위해서 논리를 넘어서는 노력도 할 것이다. 시의 울림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존재의 소리를 가진다는 말에서 시를 쓰는 입장의 사람으로 새삼 많은 것을 깨닫는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이미지의 울림, 소리를 가진 시를 쓸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이제 시를 어떤 마음으로 써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감이 동시에 어렴풋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