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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분석] ‘추함’ 속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다

에곤 실레 작품 분석, 클림트와의 비교

by 오로지오롯이


에곤 실레의 생애


그는 두 살이 되기 전에 이미 무언가를 그려내기 시작했고, 일곱살 무렵엔 두툼한 노트 하나 가득 철도역의 기차를 드로잉 해 낼 정도로 실레의 미술적 감각은 탁월했다. 실레는 아마추어 소묘가였던 그의 조부와 부친의 재능을 이어받았지만, 그런 실레를 마땅치 않게 여겼던 실레의 아버지 아돌프는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한 처벌로 실레의 드로잉 작품들을 태워 버린다. 실레는 엄격한 부친과 자신에게 냉담한 모친 사이에서 조숙한 소년으로 성장한다.


나이 14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매독으로 사망한다. 매독은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흔한 병이었다. 14세 때 매독에 걸려 죽는 아버지와 그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 어머니, 이로 인한 유년시절에 기형적인 성의 철학이 생긴 이유로 한 미술천재는 세상의 형태를 재해석해 들어간다.


성인이 된 에곤 실레의 여성 관계는 주변의 증언을 보면 그의 그림의 성적인 요소들에 불구하고 비교적 건전한 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그런 증언들이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닌 이중적인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를 가차없이 속물로 지적하는 데에는 그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은 실레와 발리 노이칠 그리고 에디트 하름스와의 연애 과정에서 빚어진 실레의 이중적 선택의 문제였다. 발리 노이칠은 실레의 모델이자 동거 애인이며 도발적이고 요염한 면을 지닌 여자였다.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솔직한 여자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노이렌바흐 감옥에 20여일 간 수감된다. 어린 소녀를 유괴해 누드화를 그렸다는 죄목이었는데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져 풀려나긴 했지만 그의 아뜰리에에 걸려 있는 그림이 "청소년을 유혹하는 포르노물"이었다는 죄목으로 드로잉 한 점이 불태워진다. 일찍이 그의 부친이 실레에게 가한 모독감을 일깨우게 했다. 감옥살이 경험은 실레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겨 그후로 실레의 성격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병역을 치르는 중 러시아 군 장교 포로 수용소에서 근무한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장교들을 모델로 다수의 스케치를 남긴다. 1918년 클림트가 사망하자 실레는 죽음에 이른 그의 모습을 스케치한다. 빈 분리파 전시화에 열아홉 점의 유화와 스물아홉 점의 드로잉을 출품하며 이 전시회는 실레에게 예술적, 경제적 성공을 안겨준다. 빈 전체에 유행한 에스파냐 독감에 아내 에디트 실레가 사망하고, 3일 후인 실레 역시 독감으로 사망한다.



[표현주의]


르네상스를 거쳐 인간으로서의 자아발견(自我發見)은 미술에 있어서도 의식의 각성을 깨우쳤으나 표현주의(表現主義) 작가들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자아표출에 가장 두드러졌던 작가들이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미술의 각 분야에 걸쳐 뚜렷하게 보였던 새로운 표현은 20세기 미술의 분명한 예시로써 자아의 확립과 개성의 감정에 기초하여 회화의 자율성, 독립성을 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의식의 과학적 탐구에서 시작된 근대심리학은 인간에 있어서의 성(性)의 중요함을 전 문화적 측면에서 깨우쳐 주었다. 특히 세기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는 프로이트(S.Freud)의 정신분석학(精神分析學) 이론과 더불어 에로티시즘의 의미가 중요성을 지니고 대두된다.

사실 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에 있어서 주제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인간적 자비심과 도덕적 양심을 바탕으로 하는 것, 즉 종교적 요소, 죽음, 그리고 성적 요소가 거의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는 이러한 표현주의의 특질 속에서 그 자신의 경험에서 여과된 상징주



[표현주의와 에곤 실레]


에곤 실레처럼 자신의 심리를 깊게 조사해 보려고 노력한 작가는 거의 없었다. 그는 경험에 대하여 그 자신이 드러내는 심리적인 반응속에서 미술의 초점을 발견하였다. 그는 예술적 반응에 대한 여과장치로서 뿐만 아니라, 인류의 고통에 대한 예수와도 같은 대행자로서 자기자신을 주된 소재(Subject)로 이용했다. 그는 수단임과 동시에 상징이었다. 따라서 실레의 자아(自我)에 대한 몰입은 개인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삶과 죽음이라는 보다 커다란 문제에 자신의 경험을 적용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모든 작품-풍경화, 초상화, 풍류화 등을 통하여 나타났고 그중 자화상에서 가장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회화에 있어서의 에로티시즘]


회화에서의 에로티시즘은 그 시각적 효과로 인해 직접적으로 자극을 주는 것으로 다양한 소재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특히 근대이후 자아의식의 확립과 함께 적극적인 면모를 갖게 되었다. 인간 의식의 새로운 조형적 전개를 모색하는 많은 예술가들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성(性)을 자기 작품의 소재로 삼아 왔다. 그것의 결과는 인간의 생과 사의 지향까지를 의미하는 에로티시즘으로 나타났다.


19세기의 성적 규범의 실체를 꿰뚫어 보려한 인물 중에서, 클림트의 선정적인 주제에 대한 열정은 근대미술 사상 보기 드물게 관능적인 누드와 화려하게 채색된 풍부한 장식적 문양을 결합하는 회화양식을 발전시켰다. 클림트의 누드에 감도는 에로티시즘이 때로는 퇴폐와 부패의 냄새를 발산하면서도 색욕(色慾)으로의 타락을 가까스로 면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죽음의 냄새와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와 융합됨으로써 어떤 형용할 수 없는 감미로운 우수(憂愁)의 기분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 형언할 수 없는 우수야말로 클림트 예술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었다.



[실레의 에로티시즘]


실레의 에로티시즘을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그것은 어린이 같이 순수한 놀람의 표현을 종종 동반하며, 가장 깊은 절망과 무기력한 공포의 본질을 갑자기 드러내기도 한다. 그 자신의 많은 노출 표현은 히스테리에 가까운 공포와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운명을 함께하고 있으며, 고통을 받을 때 그들은 동료가 되나, 서로의 외로움을 덜어주지는 않는다. 또한 실레의 에로티시즘은 죽음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과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상황을 결정하며,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존재하고 사라지는 죽음과 탄생의 주기는 우울한 슬픔과 불확실한 갈망으로 짓눌려 있는 심오한 비관주의에 빠져있는 세계관으로 해석되고 있다.


실레의 열광적인 예찬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열정(실레 자신이 그의 그림에 쏟는)에 주목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그의 작품의 감성적힘에 갈채를 보내고, 또 어떤 이들은 그를 천박한 자기 중심주의자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거의 일관된 것은 가장 주목을 받았고, 그로 인해 그의 폭넓은 작품의 깊이를 무색하게 한 것이 바로 실레의 직선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사실이다.


에곤 실레는 19세기와 20세기-상징주의와 표현주의-의 사이에서 배회하면서 인간의 존재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삶, 사랑, 고통 그리고 죽음의 의미는 정녕 무엇인가?” 이러한 청년기의 탐구심 그 자체가 실레가 남긴 유산을 이해하는데 중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에로틱한 주제(Erotic theme)]


실레는 자신의 자화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성(性)적인 느낌에 있어서도 주체인 동시에 객체였다. 그의 자화상에 대한 집착은 일종의 자위(Masterbation)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실레의 작품에서 매우 뚜렷이 나타나는 애로틱한 주제로서의 자위, 이성에 대한 호기심, 성적 노출 등은 성숙한 이성관계의 정립에 필요한 보편적인 사전단계였다. 마찬가지로 실레의 많은 누드화에서 보이는 자웅동체의 특징은, 실레 또래의 남자들이 발달과정에서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성적 우유부단(Sexual ambivalence)'을 강조하고 있다.


실레가 동성연애 테마에 계속 집착했던 것은 그의 누나 멜라니(Melanie)의 레즈비언 성향때문이었다. 그의 작품 “우정”(Friendship)이나 “모녀의 딸”(Mother and Daughter)에서 잘 보여진다.


구스타프 클림트 같은 19세기 화가들이 여성을 그릴 때 보통 정숙한 여성을 기초로 삼아, 그들의 억압된 정서적 에너지를 매우 매혹적인 여성들의 숙명에 불어넣는 반면, 실레의 전형적인 여성 초상화는 1914년~1915년 사이에 훨씬 더 생동감이 넘쳐 흐르고 그의 선정적인 작품들은 더욱 일반화되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


자화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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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는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보는 우리들이 그의 그림을 보며 느끼는 것은 그가 유명해지기 애썼던 그런 몸부림이 아니라 그의 재능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우리들 자신의 내재된 욕망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우리의 출세에 대한 욕망, 안락함에 대한 희구, 명성에 대한 갈증, 성적인 쾌락, 관음증, 롤리타 콤플렉스와 같은 것들 말이다. 에곤 실레는 감추려 했는지 몰라도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중성과 그 자화상을 보는 관객들의 이중성을 여지없이 들추어내고 있다. 오늘날 그의 회화가 전세계의 미술관에 걸려 있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에곤 실레는 다소 속물스러운 면이있다. 그래서 더 인간적이다. 인간은 모두 그런 법이다. 그의 작품들은 살펴보면 벗고있는 사람들 혹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모녀와 딸, 한 쌍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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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빈에서 동성애는 금기사항이었다. 하지만 실레에게 금기라는 단어는 통영되지 않았다. 하지만 실레는 수많은 동성애 작품을 남겼고, 이 작품도 그 중 일부일 뿐이다. 여기서 실레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곳만 그리고 나머지 신체부분은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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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처럼 창백한 엄마와 아기의 모습에서 실레를 사로잡았던 삶과 죽음의 세계가 엿보인다. 이 그림의 배경에는 실레가 직접 겪어야 했던 1차 세계대전도 있지만, 그의 가족사도 있다. 실레는 어렸을 때 누나를, 그리고 청소년기에 아버지를 잃는다.



발리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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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는 원래 화가 클림트의 모델이었는데, 1911년 실레를 만나 그의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둘은 실레가 결혼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발리는 실레에게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집안 일은 물론이고, 실레의 선정적인 누드 드로잉을 고객에게 전달하는 심부름도 했는데, 그런 심부름을 할 때면 고객들의 성적 희롱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발리는 순진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실레의 그림에 에로틱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었다. <발리의 초상>에서 그녀는 순진한 듯하면서도 요염한 눈빛과 자세로 상대방을 유혹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아는 여자였다.




클림트와 실레의 에로티시즘 작품에 대한 특성 비교


클림트의 에로티시즘 작품은 상징성과 장식성을 통해 역사적 모티브를 도입한 작품 유디트Ⅰ,Ⅱ등과 같이 여성의 이미지를 요부(femme fatale)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가부장적인 문화의 억압에서 해방된 듯한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고 또한 빈 상류층의 귀보인들을 모델로 한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다. 요부상은 무엇보다 여성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으며, 그것은 나아가 인간에 관한 진실이기도하다. 또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시기, 서구 여성의 지위와 사회적 역할의 변화 양상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알 수 있다.


클림트의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누드화나 여인의 초상화에서는 성을 육감적으로 감미롭게 표현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클림트는 생기 있는 색채, 화려하고 도발적인 주제를 장식적 요소를 통해 완성한 독창적인 화가로 조형성을 종합주의적 입장에서 추상성으로 이끌었고 특히 그의 여인 초상화는 종래의 아카데믹한 스타일을 벗어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현대미술의 다양함을 제시한 화가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반해 실레의 에로티시즘작품의 특징은 클림트처럼 사회의 모순을 화려한 장식으로 은폐하거나 미화하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비극을 신랄하고 완벽하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자기 만족을 얻었고, 자기 모순을 감춰두고자 했던 위선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실레는 일생을 통해 에로티시즘을 화두로 작업했는데 그 배경을 살펴보면 앞에서 그의 생애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유년기의 가정환경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레의 회화는 자신의 내적인 상처를 성(性)이라는 매게를 통하여 전달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감동은 인간의 원초적 단면을 단순한 미적 차원을 벗어나서 철저한 문제의식과 그 시대에 대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로 여성의 누드화와 자기자신의 모습을 주제로 작업했으며 인체의 뒤틀린 모습을 통해 그의 인간적 고독을 표출하고 있다.


이것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클림트가 여인화를 통해 탐미적이고 관능적이며, 신비하고 초월적인 에로티시즘을 표현했다면, 실레는 현실을 일상적 세계로 끌어내어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억압된 잠재적 성을 해방시키고 나아가 인간관계의 새롭고 구체적인 의미 속에서 탈 신비화된 에로티시즘을 보여주고 있다.



에필로그


이러한 에로티시즘을 작품의 핵심 주제로 삼았던 클림트와 실레가 살았던 19세기말의 사회현상은 국민들의 의식을 현실 도피적이고, 퇴폐적 환상에 빠져들게 했다. 이러한 무질서한 시대성을 반영한 클림트의 작품세계는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황홀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의 기능은 관능의 무한한 힘을 생생히 들어내고 있으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새롭게 상징과 장식 등의 독특한 표현능력을 통해 관능적으로 환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여성을 억누르던 가부장적인 문화와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지향을 갖고 있었던 자유주의적 에고(ego)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반면에 실레의 작품에 나타나는 에로티시즘은 음지에서 살아가는 군상을 표현했으며, 그들의 뒤틀린 욕망과 부르조아의 위선적인 허위를 성적 욕망이라는 인간본능의 원초적 단면을 통해 적나라하게 조명하고 있다. 실레의 에로티시즘의 기능은 작가 자신의 절망적인 고독과 무의식을 격력하게 뒤틀린 에로티시즘 작품을 통해 드러냄으로서 기존사회체제를 비판하고 있다.


위와 같이 클림트와 실레는 에로티시즘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통해 서로 다른 사상과 형식으로 표출하고 있다. 오늘날 그들의 작품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까닭은, 성적 쾌락만을 추구하여 정신적으로 고갈된 현대인들의 소외된 감정에 클림트와 실레는 그들의 작품 속에 정신적인 측면을 부각시켜 에로티시즘을 표현하고 있기에 오늘날 현대인들의 폭넓은 대중적 인기와 공감을 얻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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