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평온이란 감정을 느낀 날
인생에는 늘 여러 이슈가 생긴다. 크고 작은 선택들, 지나고 나서야 이름 붙이게 되는 실패와 후회 같은 것들. 그래서 사람들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개는 무언가를 바꿀 수 있었던 순간을 떠올린다. 하지만 내가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은 하루는 그런 날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래서 더 이상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하루다.
아마 일곱 살이나 여덟 살쯤이었을 것이다. 정확한 나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풍경은 비교적 선명하다. 일요일이었고, TV에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나오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 애니메이션을 보다 말고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일부러 잔 것도 아니고, 피곤하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잠이 들었다는 감각만 남아 있다.
얼마나 잤는지는 모르겠다. 한두 시간쯤의 낮잠이었을 것이다. 깼을 때 거실에는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엄마는 거실에 앉아 세탁물을 개고 계셨다. 내 몸 위로는 어릴 적 내가 애착하던 곰돌이 문양의 이불이 덮여 있었다. 아마 엄마가 잠든 나에게 조용히 덮어주었을 것이다. 아빠는 당시 조기 축구회 임원이셨으니, 운동장에 나가셨을 것이고, 형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허구헌 날 괴롭히던 형이 주변에 없었어서 더 좋은 하루였을까?)
아무튼 그저 주변의 소리가 크지 않은 어느 나른한 오후였다. 누군가 급하게 움직이지도 않았고, 나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날 나는 아주 깊게 잔 것 같다. 아니면 아무 꿈도 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잠에서 깼을 때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몸이 가볍고, 머리가 맑았고, 이유 없이 편안했다.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너무 개운하게 잤어. 내 인생에서 가장 편하게 잔 것 같아.
이 말은 지금도 문장 그대로 또렷이 기억한다. 어린아이가 하기엔 조금 과하고 웃긴 말일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그 말 말고는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기억은 유난히 오래 남아 있다.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길바닥에 드러누워 울었던 기억이나, 유치원에서 소변을 보고 팬티를 갈아입었던 기억을 빼면, 거의 첫 기억에 가깝다. 그래서 가끔 생각한다. 왜 하필 그렇게 평범한 하루의 한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왜 나는 수많은 날들 중에서 그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게 되는지.
기억이란 결국 어떤 사건을 저장하는 일이 아니라, 그때의 나를 보존하는 일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는 잊어버려도, 그때 어떤 상태였는지는 오래 붙잡고 살아간다. 어쩌면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말은, 지나간 시간을 향한 향수가 아니라 한때 가능했던 나의 상태를 다시 떠올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날의 나는 무언가를 애써 붙잡지 않아도 되었고, 잃을 것을 미리 계산하지도 않았으며, 지금처럼 바쁘게 의미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잘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아도 되었고, 다음을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 하루 속의 나는 지금보다 덜 불안했고, 덜 서두르며, 조금 더 나 자신에 가까웠던 것 같다.
아마도 그 하루는 내가 평온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꼈던 날인지도 모른다.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인 건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그때 이미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가 있다는 걸. 그래서 나는 지금도, 가끔 이유 없이 그날을 떠올린다. 미치도록 돌아가고 싶은 단 하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