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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좀 챙길게요. 하나

나를 살리는 일 들 중 하나. 글쓰기

by 오롯이

'챙기다'라는 말이 어색하다. 평소에 잘 쓰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챙긴다는 말에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걸까? 어색한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이 제목으로 글을 쓰는 이유는 이 말만큼 내 생각을 표현하기 좋은 말이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도 사실 어색하다. 회복의 여정 중 하나로 글쓰기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처음 글을 쓰려고 했을 때, 글쓰기가 무슨 도움이 될까?라는 의심이 가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글쓰기는 부담스러우면서 불안한 마음이 올라오거나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으면 늘 다이어리나 이면지에 나의 생각이나 마음을 끄적이는 일들을 계속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아이러니함들이 나를 깨닫게 한다.


무언가를 쓰고 싶을 때는 복잡한 상황이 가득할 때가 많다. 나는 늘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그 현실이라는 것이 매우 복잡한 녀석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들을 모두 뭉쳐놓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현실이라고 착각하며 당장 해결해야 할 나의 문제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 글은 어찌 보면 나의 생존기록이다.


생존 기록……. 이 말이 꽤나 거창해 보이지만 나는 나의 이 모든 기록을 통해 나를 살리고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이 모든 글들을 생존기록으로 부르기로 했다. 자기애성 인격장애 즉 나르시시스트를 만나고 그들에게 걸려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물리적으로 떨어져 지내며 벗어난 듯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여전히 괴롭고 영향을 받고 있다. 그 영향이라는 것이 처음보다는 작아졌고 나의 삶에 가장 작은 부분 같지만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것이 주는 상처는 매우 깊고 아프다. 이것은 겪지 않으면 전혀 모를 고통. 이것은 마치 아예 다른 세상의 일들을 말하는 것과 같다.


나에게 마주한 현실을 바로 보기까지 시간이 정말 많이 걸렸다. 나를 아는 것 같으면서도 나를 몰랐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나를 위한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기를 잘 정리하고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배우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이 글을 쓰며 정리하는 시간이 나에게 그 첫걸음이다. 어쩌면 나를 기준으로 하는 현실 인식이라는 것의 출발이 내가 그런 일을 겪었고 그 상처가 여전히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었기에 쉽지 않았다. 그 아픔을 잊고 싶었고 회피하고 뒤로 미루고 싶었다. 그 현실을 바로 바라보는 것은 끔찍하고 숨 막히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상대가 나에게 준 지옥 같은 마음을 스스로 들고 있으면서 보기 싫고 마주하기 어려우니까 놓지 못하는 상태와 같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나 자신과 나를 힘들게 한 그들에 대한 객관화였다. 정확하게는 관계를 정확하게 설정하고 아는 것이다.

미루고만 있었던 그 일들을 마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상대가 주는 불안이 더 이상 나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나한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편과 함께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문제가 되었기에 나는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을 마주하기로 했다. 그냥 그들을 원망하고 나를 불쌍히 여기 고만 있었던 상황에서 나를 꺼내기로 했다. 나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얼마나 미루고 싶었는지 이 글을 쓰기 전까지도 나는 계속 화장실을 가고 냉장고를 뒤적이며 잠시라도 미룰만한 이유를 찾았다. 심지어 이 글을 쓰며 들을 음악을 고르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누군가에게는 추상적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꽤나 구체적인 현실 인식, 즉 객관화. 이것 없이는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나의 현실 인식을 정리해 보았다.


하나, 나는 더 이상 부모의 사랑에서 자존감을 얻어야 할 나이도 아니고 이것은 가능성이 없는 희망임을 인정한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나의 결핍지점이다. 이상적인 부모, 드라마에 나오는 사이좋은 가족에 대한 환상이 있음을 인정하고 나의 원가족에게서 그것을 바라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것들을 모두 받고 채울 수 있는 시간, 환경은 이미 지났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둘, 나를 사랑해 주는 의미 있는 타인,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소중함을 알자. 모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욕심임을 알고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부모에게는 착한 자녀, 자녀에게는 좋은 부모, 배우자에게 늘 매력 넘치는 배우자가 될 수 없다. 비교는 나도 모르게 나르시시스트들이 심어놓은 도구임을 알자.


셋, 나르시시스트와 동조자는 세트구성임을 잊지 말자. 세트 구성에서 하나만 골라 관계를 유지하는 것 또한 나의 환상임을 기억하자. 그 동조자가 남이 아니기에 괴로운 것이다. 동조자 자체로만 볼 수 없고 세트구성으로 이루어진 그 관계를 나는 더 이상 나의 삶에 가져올 수 없다.


넷, 나 스스로에게 주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자. 죄책감은 상대가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도구였음을 알자. 부모에게 받아야 할 사랑과 애착을 못 받고 그나마 상대가 나를 통제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체면을 위해 나에게 준 오락가락한 좋은 기억들까지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곰팡이가 핀 귤에서 곰팡이 핀 부분을 제외하고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전체를 버리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다섯, 상대가 변할 거라는 헛된 희망은 버리자.


여섯, 내 삶을 내가 잘 살아내지 못했다는 슬픈 현실을 받아들이자. 선택과 결정을 두려워하며 살았던 것은 그것들이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마음에 들지 말지를 고민하며 상대의 변화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던 시간이 길수록 나의 요구나 생각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착하게 산 것이 아니라 나만의 경계가 없었고 나의 선택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음을 알자. 이제는 나의 선택과 결정을 스스로 하고 이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함을 인정하자. 누군가가 준 마음의 지옥을 받아 들고 이거 준 사람이 나쁘다고 말하며 계속 들고 있지 말자.


아픈 현실이다. 너무 아파서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만 수용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을 갈 수 있다.

누군가가 넘겨준 지옥을 스스로 들고 있다면 그 지옥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누가 만든 지옥인지 알면 그 지옥을 이겨낼지 아니면 버릴지 결정된다. 나는 나의 일로 괴로운가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일들, 생각들로 인해 괴로운가를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은 살아가면서 나의 경계를 세워야 하는 필요성을 못 느끼고 가족을 비롯한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부딪히고 수용하는 경험이 적어서 벌어진 일들이라고 정리하였다.


나의 삶에는 나 스스로 나를 배반한 흔적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 흔적들을 보면 나도 공짜로 한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좋은 것이 나에게도 좋은 게 아니라 상대의 요구를 들어줄 때 갈등이 없기에 그것을 선택한 결과였다.


글쓰기를 통하여 나는 나의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그것들을 제삼자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를 배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 힘든 일을 하기로 한 나.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문제로 힘들어하는 우리 모두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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